<유승삼칼럼>대통령 만들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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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신한국당 이홍구(李洪九)고문이 경선을 포기하면서 밝힌 소회 가운데 가슴을 찌르는 대목이 있다.“솔직히 우리 정치풍토에 다소 실망스러운 면이 있다.국민들은 정치가 이대로는 안되고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다가도 막상 선택의 시간만 오면 옛날 것으로 돌아가는 행태가 나타난다.” 이 말을 들으며 문득 연상됐던 것은 87년 대통령선거였다.87년 대통령선거가 어떤 선거였던가.26년의'군사독재'끝에 맞이한 선거가 아니었던가.또 바로 열흘 전 10주년을 기념했던 저 눈물과 피로 얼룩진'6.10항쟁'이 쟁취한 선거가 아니었던가.그런데 그 결과가 노태우(盧泰愚)의 당선이라니.표가 갈렸기 때문이라지만 盧후보가 김영삼(金泳三)후보(28%)나 김대중(金大中)후보(27%)보다 더 많은 36.6%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에 당선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 아닌가.개인적으로'역사'니'국민'이니'민중'이니 하는 것을 믿는 쪽이지만 노태우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는 개표진행을 보여주던 87년 12월16일 밤만은 오히려 국민이 한없이 몽매(蒙昧)한 존재로만 느껴졌다.

李고문을 87년 대선당시의 YS나 DJ만큼의 큰 얼굴로 평가하려는 것은 아니다.뿐만 아니라 李고문이 경선을 포기하게 된 큰 원인이 그가 지적한'실망스런 정치풍토'라고 보지도 않는다.그가 출마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 원인은 대부분 그 자신이 책임져야 할 성질의 것이다.다만 그가 지적한대로의 정치풍토가 존재하는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그런 풍토에는 국민들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李고문은 지난 3월 경선에 참가할 뜻을 밝히면서 출마(出馬)대신'출우'(出牛)라는 표현을 썼다.“소의 해니 말대신 소를 타고 나가겠다”는 것이었다.이렇게 감칠맛 있게 말을 할 줄 아는 정치인은 흔치 않다.그러나 현실정치에선 이런 수준 높은 말솜씨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또한 그는 지구당위원장이나 대의원을 피부로 접촉하며 패거리를 지어나가는 전술 대신 연쇄적인 정책포럼을 통한'정책대결'을 경쟁의 수단으로 삼았다.다분히 이상적이고 교과서적인 접근이었다.그러나 이 역시 결과는 참담한 실패로 나타났다.

우리 정치는 패거리정치인게 문제고 하루 빨리 정책대결로 나아가야 한다고 떠들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그의 정책대결론이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한 것은 그의 정치역량 부족 때문만이 아니라 풍토가 잘못 돼 있는데도 그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정가에선 이번이'마지막 지역싸움'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그래서인가 대통령을 꿈꾸는 사람들의 입에선'원조(元祖)'를 다투는 음식점처럼'진짜 TK'니'PK 대표주자'니,'중부'니 '충청대표'니 하는 말들이 주저없이 공개적으로 내뱉어지고 있다.기막힌 것은 이런 뻔뻔스럽고 노골적인 주장들이 오히려 더 설득력과 지지를 얻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니 다음 정권에 대한 욕심만 굴뚝같지 국가경영에 대한 준비엔 관심이 있을리 없다.연이은 TV토론회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여야 정치인들의 말솜씨는 번드레했다.그러나 그들이 보여준 국가경영능력은 실망스러웠다.한 후보는 국방비도 늘리고 교육비도 늘리겠다는 허황된 선심성 발언을 늘어놓았다.그런가 하면 또 다른 후보는 정보화의 부정적 측면을 묻는 질문에 고작 답변한다는게 음란물에 청소년들이 노출된다는 것이었다.이런 답변으로 해서 패널리스트로부터“책 좀 보시라”“공부 좀 하셔야겠다”는 면박을 당하긴 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진실로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발견할 수 없었다.

정치지도자의 능력이 어느 때보다 중요시되는 이 시대에 우리 정치인들은 여전히 연고주의나 돈과 같은 낡은 시대의 주술(呪術)로 정치적 욕망을 채우려 하고 있다.이는 분명 개탄할 일이나 그런 정치인을 만든 것은 결국 우리들일 것이다.

TV토론은 선거과열을 막는 좋은 수단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칫 인상좋고 허풍과 너스레를 잘 떠는 정치인이 인기를 얻기 쉽다.언론들과 대의원들이 앞장서서 후보들을 정책대결의 장(場)으로 내몰아야 한다.그래야 진짜 능력을 가늠해 볼 수 있다.이번이야말로 대통령을 그냥 뽑을 것이 아니라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들어내야 한다.시간은 아직 충분하다. 유승삼 중앙 M&B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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