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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필링>성숙과 패기의 조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도쿄에 출장을 다녀왔다.여전히 신주쿠역은 소란스러웠고,토요일 저녁 시부야의 거리에는 젊은 아이들이 주저앉아 잡담하고 있었다.텔레비전은 하루 종일 고베의 연쇄살인범에 대한 이야기로 특집을 꾸미고 있었다.그리고 나는 일이 끝나면 저녁마다 홀린 사람처럼 영화관을 전전했다.

지금 도쿄에서 가장 흥행이 잘되는 영화는 모리타 요시미츠의 불륜에 관한 중년남녀의 사랑이야기'실락원'이었고,이미 올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이마무라 쇼헤이의'뱀장어'를 상영하고 있었다.대니 보일의'트레인스포팅'을 28주째 상영하고 있었고,'샤인'은 열광적인 지지를 불러 모은 나머지 영화의 실제 모델인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헬프갓의 연주회까지 열릴 예정이라는 광고가 거리마다 붙어있었다.

그런데 불현듯 영화가 끝나고 자막을 다 읽고 일어나면서 영화관을 둘러보았다.항상 젊은이들만이 넘쳐나는 서울의 영화관들에 비하면 도쿄의 영화관들은 연령층이 고르게 분포돼 있다는 것이 다르다는 점 쯤은 이미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그런데 그것말고도 무언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영화관에서 젊은이들이 거의 사라졌다는 사실이다.심지어 예전같으면 토요일 올나이트(밤새 영화를 상영하고 새벽에 끝나는 것)상영을 하는 극장들은 젊은이들의 차지였을텐데'스타워스'를 상영하는 극장은 다소 과장하자면 양로원 시사회 같아 보였다.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물어보니 이유는 간단했다.젊은이들이 영화를 보기에는 영화관 입장료가 너무 비싸고(영화 한 편에 무려 1천8백엔!),게다가 그것 말고도 즐길 수 있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이다.이번 칸영화제에서의 승승장구(그랑프리와 신인감독상)가 일본영화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 않느냐고 질문했더니 단 한마디로 부정했다.아무도 칸영화제 수상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영화제 수상은 감독이 받는 것이지 그 나라가 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이것은 비관적인 것일까? 차례로 대답해보자.영화를 보는 관객의 나이가 높아지다 보니 영화가 나이를 먹는 것이 눈에 선명할 정도로 드러나 보였다.그래서 이 영화들은 모두 어른의 영화였다.말 그대로 어른이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연륜과 삶에 대해 돌아보는 자기의 시선을 갖고 있었다.힘은 없지만 그 속에는 진지함과 성숙함이 있었다.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오자.지금 한국의 영화는 10대들의 영화다.소란스럽고 활기가 넘친다.고등학교를 야구 방망이로 부수는 장면에서“멋지다”는 소리를 듣는다.남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거리의 어린 깡패이거나 젊은 부랑자들이고,그도 아니면 패배자들이다.여자 주인공들은 대부분 결혼을 앞두고 고민에 빠져 있다.모두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이 넘쳐나고,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외친다.나는 거기서 넘쳐나는 힘을 본다.그러나 거기에는 삶에 대한 아무런 사유가 없다.

나는 결코 둘중 어느 한쪽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정말 옳은 영화문화는 두가지를 다 가지고 있어야 한다.그래서 우리들은 왜 한국영화에서 어른들의 영화가 모두 사라져 버렸을까를 물어보아야 한다.아무리 힘이 넘쳐도 정말 철없는 영화들만으로 영화관이 가득 차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영화관은 고아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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