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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감원, 44개 그룹 자금사정 긴급 점검 나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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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금융감독원이 대기업들의 자금사정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짐에 따라 대기업의 거액 부실이 은행에 전가돼 금융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는 일이 없도록 미리 챙겨보겠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다음 달 10일까지 44개 그룹의 자금사정을 파악해 보고하라고 각 그룹의 주채권은행에 요청했다고 22일 발표했다. 평가 대상은 삼성·현대차·SK 등 주채무계열 순위 1~43위의 그룹과 지난해 하이마트를 인수해 주채무계열에 포함될 것으로 확실시되는 유진그룹이다.

이에 따라 은행들은 지난해 9월 말 기준의 회계자료를 바탕으로 그룹별 자금사정과 재무구조 평가에 착수했다. 금감원은 부채비율 등 일반적인 재무지표 이외에도 그룹별 단기자금 수요에 대해서도 별도의 자료를 요청했다. 또 큰 손실이 발생할 만한 사업이 있는지, 신인도가 하락할 만한 큰 사건이 일어난 적이 있는지도 평가에 포함된다.

금감원 김영주 기업금융개선3팀장은 “실물경제의 어려움이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여 각 은행에 대기업들의 자금사정을 파악하도록 했다”며 “분기별로 모니터링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보통 금감원은 3월 결산이 마무리된 4월께 이 같은 자료를 요청했는데 올해는 시기가 크게 앞당겨졌다. 그만큼 대기업의 자금사정이 빠듯해졌다고 본 것이다. 최근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 김종창 금감원장이 대기업·중견그룹에 대한 모니터링을 강화하겠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익명을 요구한 시중은행 여신 담당자는 “금감원이 통상적인 자금사정 파악 때와는 달리 그룹별 단기자금 수요까지 파악하도록 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부 최상위 그룹을 제외한 상당수가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다. 금감원은 자체 분석에서 2개 그룹의 자금사정이 위험 수준에 이른 것으로 봤다. 또 금융권에선 6~7개 그룹을 잠재적 부실 요인을 안고 있다며 주시하고 있다. 대기업들의 어려움은 지표상으로도 잘 드러난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엔가이드가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128개 주요 기업에 대한 실적 추정치를 집계한 결과, 지난해 4분기 영업이익과 순이익은 전 분기보다 각각 27.6%, 50.5% 급감했다.

따라서 일부에선 이번 점검을 대기업 구조조정의 시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해 금감원 신응호 기업금융1실장은 “대기업의 자금사정이 어떤지 파악해 사전에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 위한 것”이라며 “확대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금감원이 대기업에 대해 곧 구조조정에 착수하는 것은 아니다. 금감원은 ‘상시 모니터링’이라고 설명한다. 평가 결과를 놓고 등급을 매길지에 대해서도 정해진 게 없다. 말 그대로 그냥 들여다보겠다는 것이다.

평가 결과가 나와야 금감원은 구조조정을 얼마나 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있다. 금감원은 ▶처리해야 할 부실 규모 ▶금융회사에 대한 부담 ▶예상되는 인력 감축 규모 등을 대략 추정하게 된다. 이를 근거로 금감원은 은행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구조조정 방안을 높고 도상연습(시뮬레이션)을 할 예정이다.

변수는 역시 은행들의 체력이다. 이미 16개 건설·조선사가 워크아웃이나 법정관리를 준비 중이다. 은행들에 대기업 구조조정은 이보다 훨씬 큰 부담이다. 따라서 본격적인 구조조정을 위해선 금융위 주도로 추진 중인 은행자본확충펀드가 실제 조성될 필요가 있다. 이를 감안하면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결정되고, 집행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문제는 평가 잣대가 얼마나 현실성을 지니느냐는 것이다. 금감원의 지시에 따라 지난해 9월 말 기준의 회계자료를 들여다볼 경우 엉뚱한 평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경제 여건이 워낙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미국발 금융위기가 국내 경제에 충격을 준 것은 지난해 4분기부터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2008년의 자료로 지금의 경영상황을 판단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김준현 기자

◆주채무계열=주채권은행이 부채 규모를 종합 관리하는 기업집단(계열). 기업이 쓰고 있는 대출·지급보증의 규모가 금융회사 전체 대출의 0.1% 이상일 때 지정된다. 이에 속한 회사의 재무구조가 나빠지면 주채권은행이 주도해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을 실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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