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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에서>1. 영광 법성포 (1)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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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저녁노을이 비껴간 자리에 몇점의 구름이 한가롭게 떠있다.포구에 정박한 배들이 하루를 마감하는 모습은 한폭의 수채화다.그러나 개발논리에 밀려 점차 사라져가는 포구.어민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포구의 어제.오늘.내일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조아머리(전남영광군법성면진내리)는 서해 바닷물이 법성포로 들어오는 물목에 있는 자그마한 언덕이다.조아머리에 오르면 멀리 칠산도를 비롯한 7개의 무인도가 가물가물 들어온다.그 앞이 조기잡이로 유명한 칠산 앞바다.칠산도 넘어로 낙월도.송이도등 서해의 여러 섬이 숨어있다.

바다가 거칠고 비바람이 몰아치면 법성포 아낙들은 조아머리에 오른다.바다로 나간 아들과 남편이 탄 배의 깃발을 찾아 까치발을 하고 칠산 앞바다를 내려다 본다.조아머리는 고깃배를 떠나보내고 한시라도 마음을 졸이지 않은 날이 없었던 법성포 아낙들에게 희망과 절망이 교차했던 삶의 터전이었다.

목욕재계한 선주는 정성껏 음식을 장만해 상을 차리고 풍어와 어부들의 안전을 기원하는 용왕제를 올린다.

'용바위 젯날을 앞두고 보름전부터 남자고 여자고 한시라도 음탕한 생각을 할 수 없었다.춘호는 지난해 용바위 젯날 때 구강진 홍련이와 귓속말을 주고받다 들켜 열흘 넘게 뭇매질을 받고 반병신이 돼 시름시름 죽어갔다.귀덕이는 그런 춘호가 성큼성큼 물비늘을 밟고 다가오는 착각을 하다 으스스 또 한차례 모진 소름을 탄다.'(천승세의'낙월도'에서) 바람결에 펄럭펄럭 흩날리는 오색의 제장(祭帳)이 요란스럽다.'둥-둥-둥-'징소리가 포구를 뒤흔들면 제선(祭船)을 비롯한 배들이 나루를 박차고 나간다.

1년 열두달 사고없이 풍어를 비는 뱃사람들의 기원은 어느 어촌이나 마찬가지다.징소리가 울리면 바다에 물밥이 뿌려지고 그것을 좇는 숭어떼가 뱃전으로 몰려든다.

법성포는 굴비로도 유명했지만 고려때부터 조창(漕倉.세금으로 낸 곡식을 모아 한양으로 나르기 위해 만든 창고)이 세워져 국가 재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각지에서 유수한 물상객주(장사치들의 상품을 흥정붙이는 사람)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뤘다.이곳에는 목화.누에.소금과 모든 어종의 가공산업이 발달했다.

주변 경관이 뛰어나 조정의 고관대작은 물론 시인묵객도 자주 찾았던 법성포.단오절 전야제는 유람선을 칠산 앞바다에 띄우고 삼현육각을 잡혔다.숲쟁이(법성면진내리)에서는 씨름.그네뛰기와 함께 명인. 명창도 뽑았다.그래서 법성포 단오제는 예부터 강릉 단오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유명했다.

법성포는 원래 고법성(법성면입암리)지역에 자리잡았다.1900년대 들어와 9백여년을 이어왔던 조창이 폐쇄되고 법성포는 자그마한 어촌으로 전락해 주민들은 굴비산업에 연명해왔다.그러나 원자력발전소의 건립과 그곳에서 배출되는 온수가 생태계를 파괴하자 그것마저 위협받게 됐다.화려했던 옛날의 영화는 사라지고 육지의 굴비산업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법성포.읍내에 굴비 판매업소가 2백13개에 연간 매출액이 1천2백억원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만하다.그러나 지금은 21세기 서해안시대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도약하기 위해 법성항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이제 만선의 꿈을 안고 출항한 어선이 해거름에 깃발을 나부끼며 돌아오던 모습은 거의 찾을 길 없다.그러나 법성포 주민들은 법성항이 완공되는 날 옛 명성을 다시 얻을 수 있으리라는 꿈에 부풀어있다. 영광=김세준 기자

<사진설명>

9백여년간 조창으로 국가재정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법성포의 단오제는 강릉 단오제와 쌍벽을 이룰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하다.용선제에 참가하기 위한 배들이 오색 깃발을 휘날리며 포구를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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