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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피치] 160. 잘가라 야생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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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마가 떠난다. 이상훈의 은퇴. 인사이드피치 139회에도 썼지만 '빠삐용'의 주제가 '바람처럼 자유롭게(Free as the wind)'가 또 한번 생각난다. 말 그대로 '훌쩍'이다. 빠삐용이 감옥에서의 여생을 거부하고 끝없이 자유를 갈구했던 것처럼. 이상훈도 그렇게 살아간다. 수억원의 연봉이 가져다줄 경제적 안정은 그에게 '존재의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에게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마운드에서의 승리와 팬들의 박수소리였다. 그것만이 그의 세상이었다.

지난해 5월, 그는 한 인터넷 팬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영화 '브레이브 하트'에 대해 말했다. "영화 속의 주인공 윌리엄 월러스(멜 깁슨)는 자유에 목이 말라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목숨을 걸고 싸운다. 결국에는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프리~덤!(자유)'이라고 외치면서 삶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다. 이 영화를 일곱 번 정도 본 것 같다. 그러나 전혀 지겹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고, 보면 볼수록 그 영화에 빨려들어갔다"라고.

그는 야구장의 윌리엄 월러스로 살았다. 자신의 등판을 기다리는 팬들은 영화 속에서 월러스를 따르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이었고, 그는 그들에게 자유(승리)를 얻게 해주는 메신저였다. 팬들의 박수소리와 함성은 자유를 향한 외침, 승리를 향한 절규였다. 그는 자신의 왼쪽 어깨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유를 안겨줬다. 그것이 인생의 의미였다.

그는 마운드에서 상대타자와 싸우면서 팬들에게 승리의 보답을 해줬지만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진지하고 '따뜻한 마음'을 전달하지 못해 아쉬워했다. 그는 그때 올린 글 후반에 이렇게 적었다.

"팬들에게 나도 뭔가를 해주고 싶었다. 늘 받기만 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나는 팬들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미안하다"라고.

그는 어쩌면 그래서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야구공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에 마음을 담아 팬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서,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뜨거운 감정을 고맙다는 인사 대신 전하기 위해서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불렀는지도 모른다.

그는 올 시즌 초반 구위가 떨어져 이길 수 있는 경기를 놓치고, 팀 성적과 분위기마저 바닥으로 가라앉자 5월 초쯤 팀 안의 절친한 동기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나 때문에 다들 너무 힘들어졌어. 난 중간이건, 패전처리건 다 괜찮아. 내 이름, 내 비중 때문에 감독님도 힘들어 하시는 것 같고…. 팀 분위기도 가라앉은 것 같다. 너무 힘들다. "

그때 이상훈은 '은퇴'라는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최후의 카드를 각오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에게 스타로서의 책임과 명분을 요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야구를, 팀과 동료를, 그리고 팬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나 사랑해서' 떠났다고 믿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가 정열적으로 휘날렸던 갈기 머리만 가슴속 깊숙이 담아두었으면 좋겠다. 그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진정 이. 상. 훈. 다웠다.

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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