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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전 국민의 지도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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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 강찬호 워싱턴특파원

"미국은 우상을 잃었다. 그의 애국심과 조국에 대한 헌신은 잊히지 않을 것이다."(토머스 대슐 민주당 상원의원), "그는 미국 사랑의 정신을 미국인에게 전염시켰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는 미국인의 입이 돼줬다."(민주당 대선후보 존 케리 상원의원)

93세를 일기로 지난 5일 타계한 로널드 레이건 전 미 대통령에 대해 그가 소속됐던 공화당이 아니라 라이벌인 민주당 지도자들이 언급한 추모사다. 언론과 국민도 정치적 입장을 떠나 진심으로 슬퍼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칭찬에 후한 미국인, 미국 언론이지만 '자이언트(거인)'나 '히어로(영웅)'같은 극찬은 함부로 하지 않는다. 그런데 레이건에게는 아낌없이 쏟아지고 있다.

전 국민이 당파와 정견을 초월해 나라의 어른을 잃었다는 슬픔을 함께하는 모습이다. 남북전쟁 이래 최악의 분열을 겪고 있지만 레이건의 죽음을 계기로 펼쳐지는 광경은 미국이 아직 그렇게 찢어진 나라가 아니란 느낌을 갖게 만든다.

레이건은 대통령 재임 시절 머리가 좋다는 평가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했고, 야당이 공격하면 가시 돋친 응수 대신 재치있는 농담으로 대화 분위기를 이끌어냈다. 그런 친화력은 세대와 계층, 정당의 구분을 초월했다. 민주당 소속 젊은이와 노동자들이 레이건의 재선 운동원으로 변신해 "한번 더!"를 외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덕분에 압도적 표차로 재선에 성공한 레이건은 '그레이트 커뮤니케이터(위대한 소통자)'란 칭호를 얻었지만 "내가 아니라 국민이 위대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낮췄다. 그랬던 그가 죽어서까지 국민을 통합하고 나라의 분열을 치유하고 있다.

입으론 상생을 외치면서도 좀처럼 대결의 굴레에서 못 벗어나는 한국 대통령과 야당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덕목이 아닐까. 우리나라에는 5명의 전직 대통령이 생존해 있다. 이들도 언젠가는 레이건의 뒤를 따를 것이다. 그때 과연 전 국민이 진심으로 애도하는 분위기가 나올까 의문스럽다.

강찬호 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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