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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 포럼

최경주 선수가 돋보인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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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근 발매된 여성중앙 6월호에 눈길을 끄는 기사가 실렸다. '골프 신데렐라 안시현과 결별한 코치 정해심의 충격 고백'-무슨 얘기인가. 지난주 미국여자프로골프협회(LPGA) 코닝클래식 대회에서 4위를 차지, 올 LPGA 신인왕 레이스 1위를 달리고 있는 안시현 선수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찬찬히 기사를 읽었다.

잘 알려진 대로 정씨는 안 선수를 중학교 때부터 5년간 가르쳐 왔다. 그냥 지도한 게 아니라 어려운 시절 함께 견디며 키워낸 '자식'이었다. 그러나 최근 둘이 헤어졌다. 공식 결별 통고도 없어 정씨는 신문을 보고 이 사실을 알게 됐다. 심지어 얼마 전 한국에서 열린 골프대회 때 얼굴을 마주쳤는데 아는 체도 하지 않아 비참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마침 그날은 5월 15일, 스승의 날이었다.

물론 안 선수 얘기를 직접 듣지 못해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짐작하건대 미국에 진출한 이후에도 정씨는 사생활을 통제하는 등 스파르타식 훈련을 고집했고, 이 때문에 안 선수와 마찰을 빚은 것 같다. 돈에 대한 언급도 있는 걸로 봐서 문제가 전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안 선수는 '제2의 아버지'였던 정씨와 이렇게 헤어졌다. 물론 정씨의 주장이 모두 사실이라 해도 안 선수를 비난할 마음은 없다. 정씨에게는 서운한 말이겠지만 이제 안 선수도 부치 하먼이나 데이비드 리드베터 같은 명 코치의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게다가 자기 주장이 너무도 강한 요즘 신세대들을 생각하면 그러려니 할 수 있다. 그렇다 쳐도 씁쓸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매끈하지 못한 둘의 결별을 보면서 자연스레 최경주 선수가 떠오른다. 그는 지난 4월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스에서 3위를 차지해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섰다. 이제 '움직이는 광고판'이 된 그에게 대기업들이 눈독을 들일 만도 하다. 그러나 감히 엄두를 못 낸다고 한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어렵던 시절 도와준 슈페리어사와의 의리를 지키겠다는 고집 때문이다. 특히 그는 IMF 외환위기 당시 슈페리어 오픈 골프대회를 취소하면서까지 후원금을 마련해준 김귀열 회장의 은혜를 결코 잊지 못한다. 얼마 전 귀국해서도 김 회장에 대한 고마움을 재차 표시했다. 그는 언론과 인터뷰 때 반드시 슈페리어 로고가 새겨진 의류와 모자를 착용한다. 모자가 없으면 사진 촬영도 거부한다. 한마디로 의리의 사나이다.

최 선수가 돋보이는 이유는 요즘 세상 인심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은혜나 고마움을 너무 쉽게 잊고 산다. 그 대신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 올챙이 시절을 기억 못하는 개구리 같은 측면도 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게 모두 내가 잘나서 그런 줄 안다.

인간 관계뿐 아니라 국가 간에도 마찬가지다. 특히 현안으로 떠오른 미국과의 관계에서 그렇다. 요즘 "주한미군이 한국에 해만 끼쳤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며칠 전 서울대를 방문한 허버드 미국 대사도 한 학생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은 6.25 때 피흘려 나라를 지켜줬고, 우리가 배고플 때 옥수수와 밀가루를 지원해줬다. 불평등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은 물론 필요하다. 그렇다고 지난날 신세진 것까지 깡그리 잊어선 곤란하다. 서울에서 반미의 목소리가 높아갈수록 워싱턴에선 한국과 정을 떼려는 소리만 커갈 뿐이다.

마침 오늘이 재.보선 날이다. 최대 관심사는 역시 김혁규 전 경남지사 문제와 맞물린 부산.경남 지역이다. 그가 한나라당 주장대로 '배신자'인지, 아니면 '소신파'인지도 따지고 보면 결국 유권자들이 판단하게 된 셈이다.

유재식 문화.스포츠담당 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