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렴정치회고록>박정희 대통령의 여론 수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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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국가지도자는 공식 채널과는 다른 방법으로 시중의 여론을 가감없이 듣고 부단히 국정에 반영해야 한다.이때 물론 공식이 아니라고 해서 지나치게 사견에 치우치거나 다른 의도가 섞인 얘기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은 대표적으로 교수.언론인으로 구성된'수요회'라는 여론자문단을 운영했다.수요회 멤버들은 朴대통령의 통치방식을 거리낌없이 비판했으며 세인의 평을 그대로 전달했다.이들의 보고서를 받은 朴대통령은 수용하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꼭 빨간 연필로 줄을 그으면서 이들의 노고가 헛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71년 대선전부터 수요회 멤버로 활약했던 이승윤(李承潤.전경제부총리) 당시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는 나에게 이런 경험을 얘기해 준 적이 있다.

“대전(大田)유세가 끝난후 자문단이 회의를 가졌는데 한 교수가'朴대통령의 유세를 들어보니 너무 권위주의적이고 국민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였다.이건 후보의 유세가 아니라 대통령의 연설이다.한마디로 朴대통령은 간덩이가 부었다.고치지 않으면 표를 많이 잃을 것'이라고 통렬히 비판하는 거예요.” 그 교수의 표현이 하도 과격해 자문단은 보고서를 만들 때 무척 고민했던 모양이다.李씨는 이렇게 전해주었다.

“한쪽에서는'대통령한테 가는 보고서인데 이건 좀 심하지 않으냐'며 삭제를 주장했어요.다른 한쪽에서는'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표현을 살려야 한다'고 맞섰지요.갑론을박이 오고간뒤 한 사람이'그러면 우리 얘기로 쓰지 말고 유세장에서 한 청중이 대통령이 간덩이가 부었구먼 하고 퇴장하더라고 보고하자'는 묘안을 내놓았어요.대통령은 보고서를 보고선 아무런 얘기가 없었고 이틀뒤 춘천유세때는 많이 달라져 있더라고요.” 수요회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지만 대략 교수.언론인 6~7명 정도로 구성됐다.공보수석 주재로 한달에 한번 청와대에서 회의를 가졌으며 내용은 보고서로 정리돼 朴대통령에게 제시됐다.오랫동안 수요회를 관리한 인사는 김성진(金聖鎭)공보수석이었다.

한때의 회원을 보면 정재각(鄭在覺.고려대철학).박관숙(朴觀淑.연세대외교학).오주환(吳周煥.고려대).손제석(孫製錫.서울대국제정치).구범모(具範謨.서울대정치학).이승윤 교수와 동아일보 논설위원 송건호(宋建鎬)씨였다.朴대통령은 1년에 한두번 정도 직접 저녁을 주재하곤 했는데 수요회는 주로 자체적으로 활동했다.

수요회는 여러 가지 좋은 정책을 건의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72년 남북회담을 촉진하기 위한'남북이산가족찾기'였다.이것은 국제정세의 변화를 세밀하게 관찰해온 지식인들이 아니었더라면 좀처럼 내놓기 어려운 아이디어였다. 수요회는 당시 빌리 브란트 서독총리의 동방정책을 주요문제로 토론한 끝에“우리나라도 국제적인 데탕트(긴장완화) 기운에 발맞추어 장차의 남북통일을 내다보고 북한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인적.경제적 교류에 주도권을 잡을 필요가 있다”며 이산가족찾기를 건의했던 것이다.朴대통령은 이 건의를 정보부.통일원.외무부에 주어 검토하도록 했고 건의는 정책으로 실현됐다.

자문단 멤버가 모두 朴대통령에게 협조적이었던 것은 아니다.동아일보 논설위원이던 송건호씨는 朴대통령이 7대 대통령에 취임한뒤 장기집권에 대한 야당공세가 가열되자 수요회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표시했다.

나는 김성진씨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여론을 이끄는 중요한 분이니 만류해보라”고 했다.朴대통령도 宋씨의 식견과 지사적 몸가짐에 호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宋씨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공식적인 이유는 동아일보의 사규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개인적으로는 朴대통령의 장기집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자기의 정치적 소신을 金대변인에게 전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그런 사정을 바깥에 공개하지 않는 분별있는 처신을 했다.이처럼 수요회 멤버들은 자신이 청와대와 통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사적으로 이용하려 하지는 않았다.

수요회와 특별보좌관단이 기구의 형태를 갖춘 여론수렴의 양대축이었다.이밖에 朴대통령은 자신이 신뢰하는 원로들을 가끔 만나 고견을 듣기도 했다.

곽상훈(郭尙勳)전국회의장과 야당총재를 지낸 박순천(朴順天)여사가 면담을 요청하면 朴대통령은 예외없이 그들을 만났다.

朴대통령은 언론보도도 중요하게 생각했다.본청으로 퇴근할 때 조간신문의 첫 제작판을 지참했으며 저녁 TV뉴스를 보고 챙겨야할 일이 있으면 바로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나는 관계수석에게 업무를 지시했으며 다음날 바로 朴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바깥에서 사람을 만나면 잡음이 생기기도 하거니와 朴대통령이 이처럼 불시에 전화를 걸곤해서 나는 저녁식사를 꼭 집에서 했다.朴대통령이 물어봤을 때 놓치는 일이 없도록 TV를 항상 켜놓은 채. 정리=김진 기자

<사진설명>

75년 6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재미한국인 정치학자들과 담소하며 파안대소하고 있다.朴대통령은 유신이라는 강권통치를 하면서도 교수자문단'수요회'를 운영하는등 나름대로 여론을 수렴하는데 적지않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김정렴 전비서실장은 증언한다.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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