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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의 역사] 77. 석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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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 1969년 제네바에 있는 레만호를 찾은 필자(맨왼쪽).

윤주용 문화공보부 장관이 우래옥에서 불고기를 사주면서 "좋은 일 하나 합시다"라고 했다. 장충단에 짓고 있는 국립극장 개관 기념으로 뮤지컬 극본을 하나 써달라고 했다. '킹 앤 아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의 뮤지컬은 좋아하지만 경험이 없다고 했다. 그는 곧바로 나를 일본으로 보내줬다. 작곡가.지휘자.무용가.배우 등과 함께 갔다. 때마침 북한에서 온 예술단이 일본 주요 도시를 돌며 '꽃 파는 소녀'를 공연하고 있었다. 우리는 도쿄에서 훔쳐 보고 고베에 가서 또 한번 훔쳐 보았다. 김창구 국립극장장이 별 거 아니라고 혹평했다. 유명한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을 보고 나서야 참고가 되겠다고 했다. 나는 계속 도쿄에 남아 이것 저것 찾아보면서 공부한 뒤 귀국해 뮤지컬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드라마가 있어야 하고, 노래가 있어야 하고, 춤이 있어야 했다. 뮤지컬은 간단한 게 아니었다. 마침내 '백로의 꿈'이라는 것을 써주었으나 햇빛을 보지 못했다.

홍경모 KBS 사장이 창사 기념으로 한국 최초의 TV 영화를 해보자고 했다. 스위스 제네바를 무대로 한 '레만호에 지다'를 각색해주었다. 좀 시원한 데서 '남과 북'을 다룰 수 없느냐던 방우영 사장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작품료 3만달러를 요구했더니 주었다. 임학송 연출이었다. 이영하.김진해.정애리.이신재 등이 스위스로 갔다. 몽 르포공원 가까이에서 2주간 묵으며 촬영했다. 세시간짜리를 찍었다. 방송시간 문제로 90분씩 잘라 이틀간 방영한 것이 큰 핸디캡이 됐다. 세관에서 어떻게 했는지 화질이 다소 흐려 불만스러웠다. 훗날 세종문화회관의 박만규가 뮤지컬로 만들려고 애썼으나 성사되지 못했다.

홍두표 TBC 사장이 '아로운'을 다시 제작하려다 방송국이 KBS에 흡수되는 바람에 뜻을 못 이뤘다. 나중에 KBS 사장이 됐을 때 그는 또 '아로운'을 만들려고 했으나 내 원고가 늦은 데다 한.일 간 친선 무드 때문인지 성사시키지 못했다.

내가 연암 전기 때부터 방송사와 소원해진 사이에 김수현.이상현.신봉승.이윤성.김영곤.윤혁민.남지연.나연숙.정진건 등 젊은 작가들이 맹렬히 활동하고 있었다. 내 시대가 석양을 맞이한 기분이었다. '생생지리(生生之理)'다. 왕성한 활력을 가진 새로운 세대는 태어나고 또 태어난다. 나는 골프에 열중했다. 그것으로 건강을 지탱했다. 골프 상대는 남방개발(KODECO)의 최계월 회장. 그는 내 경리부장 노릇을 한 셈이다.

세상에서 내 이름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문화일보가 생겨 남시욱 사장이 연재소설 하나 쓰라기에 몇 달 동안 끙끙댔다. 그때 외환위기라는 것이 왔다. 내 집필 작업은 미뤄졌다. 그리고 시작된 겨울잠. 아주 오랫동안 잤다.

한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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