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다우닝街 10번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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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찰스 1세를 처형하고 스스로 호국경(護國卿)에 올라 영국을 통치하던 올리버 크롬웰이 1658년 세상을 떠나자 영국은 1년반 동안 무정부상태가 계속됐다.국민 대다수가 왕정 복고를 희망하고 있었음에도 그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 아무도 섣불리 나서려 하지 않았다.다소간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 일에 나선 사람이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조지 다우닝이었다.그는 몇몇 군부 지도자및 동료 의원들과 힘을 합쳐 오랫동안 망명생활을 하던 찰스 2세를 귀국토록 하는데 성공했다.

귀국한 찰스 2세는 상원을 소집하고 선거인단을 뽑아 하원을 구성하게 했다.이때 뽑힌 하원의원들은 거의가 20대와 30대 젊은이들이었다.처음 소집된 하원을 보고 찰스 2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저들의 수염이 날 때까지 짐이 데리고 있어야겠군.”그의 말대로 그 하원은 무려 18년간이나 존속했다.

그때 다우닝은 37세로 비교적 나이든 층인데다가 왕정 복고의 공로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요직이었던 네덜란드 공사를 두차례 역임했고,61세로 죽을 때까지 재정위원장을 맡아 국가재정을 좌지우지했다.말년에 런던 남서쪽 다우닝가에 건물을 지어 재무부에 임대한 것도 그의 영향력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그가 죽은 뒤 이곳에는 정부 각 부처가 속속 들어섰고,18세기 후반에는 그 10번지에 총리관저까지 세워져 명실공히 영국정부의 대명사처럼 불리기에 이르렀다.한데 총리관저의 첫 입주자는 뜻밖에도 24세의 애송이 총리였다.'소(小)피트'로 불리는 윌리엄 피트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22세 때 하원의원이 됐고,이듬해 재무장관에 임명됐으며, 그 다음해인 1783년 마침내 총리자리에까지 오른 것이다.그는 두차례에 걸쳐 20년 가까운 세월동안 총리를 지냈는데 업적중 두드러진 것은 그 이전까지 모호했던 총리의 지위를 확고하게 굳혔다는 점이다.

첫 주인이 24세였던 탓인지 19세기까지만 해도 다우닝가 10번지의 주인은 대개 40세 안팎으로 젊은 편이었다.장단점은 있겠지만 영국사람들은 젊은 총리의'싱싱한 패기'를 높이 산다고 한다.토니 블레어도 피트에 비하면 거의 아버지뻘이지만 20세기 이후의 최연소 총리라는 점에서 기대도 큰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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