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행정수도 이전 밀어붙이기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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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정부가 추진 중인 행정수도 이전이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구해야 할 사안이 돼버렸다. 한 변호사에 의해 수도이전 위헌 헌법소원 청구인단 모집이 추진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헌재 결정에 따라선 사업이 중단돼 기존에 투입된 예산과 행정력이 물거품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됐다.

이런 사태가 빚어진 것은 제대로 여론을 수렴하지 않은 정부의 오만과 독선에 원인이 있다. 행정수도 이전은 국가 백년대계가 걸린 중대사다. 그런데도 전문가와 국민이 충분히 판단하고 의사를 표시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일사천리로 추진되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우선 행정수도의 입지가 왜 충청권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다수 국민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통일의 방식.시기에 따라 최적입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어째서 서울보다 남쪽인 충청권으로 서둘러 옮겨야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오죽하면 국무총리조차 지난 2월 국회답변에서 "통일수도는 서울이 가장 적합하다"고 했을까.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유치하면 수도권이 충청권으로 확장되는 결과가 되며, 이는 지역균형발전의 명분과 어긋난다는 점에 대해서도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었다.

규모와 비용도 문제다. 대선기간 중 노무현 후보가 속한 민주당은 4조~6조원이면 이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2년도 안돼 정부는 45조원으로 열배가 불어났다고 하고, 전문가들은 100조원이 넘는다고 하니 국민은 혼란스럽다. 단순한 행정수도 이전이라고 하더니 이제와선 입법부와 사법부의 주요 기관까지 옮기는 사실상의 천도(遷都)로 바뀐 것도 마찬가지다.

추진하는 쪽에서는 국회에서 관련법이 통과됐다는 점을 들어 민의수렴의 요건을 갖췄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행정수도 카드가 여당의 충청권 공략카드였고, 반대했던 한나라당도 총선을 앞두고 이 지역 표심을 의식해 입장을 바꾼 정략의 산물이었다는 점을 모르는 국민은 없다. 정부는 이제라도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국민 여론을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 국민투표도 한 방법일 수 있다. 어떤 형태이든 반드시 국민적 논의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