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 땐 부부도 구조조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5호 15면

1998년 외환위기, 그리고 10년 만에 다시 찾아온 세계적 경제위기는 새해를 맞은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런 불황의 여파는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친다. 경제력 상실에 따른 이혼이 급증할 수 있고, 이전부터 부부 갈등의 골이 깊었다면 더 그렇다. 그동안 애정 없이 필요에 의해 결혼을 유지하던 부부는 더욱 이혼 위기에 직면한다. 특히나 가정경제의 붕괴 시 여성이 남편을 떠날 가능성이 더 높다.

불황기엔 심리적 위축에 성욕이나 성생활이 제한되는 등 부정적 측면이 있다. 하지만 성생활과 가정에 또 다른 긍정적 상황도 생긴다. 즉, 부부 사이에 구조구정이 일어난다는 점이다. 불황기엔 남성이 가정으로 돌아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외환위기 때도 나타났던 현상이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부부 사이에 불황의 위기감이 공통분모가 되어 ‘단결’을 모색하다 보면 전화위복의 계기도 된다.
“예전엔 밤마다 회식이다 뭐다 술에 취해 늦게 들어오더니 요즘은 매일 일찍 들어와 옆을 맴도는데 오히려 부담 백 배죠.”

최근 필자의 진료실엔 경제위기에 이런 고민을 하는 아내가 많이 찾아온다. 불황기에 웬 호사스러운 성생활이냐 싶겠지만, 섹스리스 등 쌍방의 성 트러블을 개선하려는 부부 환자는 오히려 늘었다. 평소엔 각자의 성기능을 치료하려는 남녀 개인 환자가 많았던 것과 대조적이다.

최근 미국 언론에서 월스트리트의 부자들을 조사한 보도도 비슷한 점을 시사한다. 남성 대부분은 불황에 애인과 관계를 청산하거나 관계 유지에 드는 비용을 줄일 계획이 있다고 답한 반면 여성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즉, 남성의 경우는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외도가 늘고 불황기엔 외도라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접는다. 경제력의 붕괴 등 생존 문제로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애인은 안중에 없다. 일단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여성의 외도는 이미 정서적으로 친밀감에 빠진 깊은 관계가 많아 불황과 무관하게 지속되는 경향이 있다. 여성의 외도가 더 파괴적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불황기엔 콘돔의 판매도 눈에 띄게 증가한다. 지난해 후반 세계적 불황기에 세계 최대 콘돔 회사의 판매량이 전년 대비 8%나 상승했다는 실적 보고도 있고, 임신 테스트와 성인용품 판매량이 급증했다는 보고도 많다. 남편이 가정으로 돌아오니 성생활은 늘었지만, 출산·양육의 경제적 부담감 때문에 출산을 기피해 생긴 현상이다. 불황에 모두 씀씀이를 줄이듯 별도 지출이 없는 가정 내 성생활은 늘 수밖에 없다는 차가운 경제논리적 해석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중요한 심리적 분석을 하자면, 경제력 상실의 불안감에 제일 가까이 있는 배우자에게서 위안과 안정감을 되찾고 보호받고 싶은 모성회귀의 잠재적 욕구가 남편을 가정으로 복귀시킨 측면도 크다. 어쨌든 불황기는 가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고 또 돌아가야 할 시기다. 이에 제대로만 대응하면 부부 사이의 불협화음을 개선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 지금은 고통을 나누는 따뜻한 말 한마디와 애정표현이 부부 사이에 평소보다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할 수 있는 때다. 너무나 힘든 불황이지만, 위기는 기회란 말이 경제뿐 아니라 부부생활에도 마찬가지니 새해 벽두에 희망을 잃지 말기를 바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