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바보스런 일상 조롱한 파격무대 - '삐삐롱스타킹' 길거리공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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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잘난 척 하지마,똑바로 살아봐,첨으로 돌아가 단추를 풀러봐,주위를 둘러봐.” 여기까지는 뭔가 풍자와 저항을 주제로 삼은 대중가요 같다.

그런데“뽀시시 아가씨 예-구정물 아가씨 으-화가 날 것 같아요”로 이어지는 다음 구절부터 노래의 방향성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종장부분인“아무말도 할게 없는데”에 이르러선“실은 이 노래도 사기야 사기!”라고 변죽을 울리는 것만 같다.

난해한(?) 가사와 더불어“워허-워허허”같은 신나는 후렴구가 인상깊은 노래'바보버스'를 들고 나온 록그룹 삐삐롱스타킹.

지난 2월 생방송 도중 카메라에 침을 뱉어 1년간 방송출연 정지를 당한 이래 처음으로 길거리를 무대삼아 공연을 펼쳤다.지난 12일 서울중계동 미도파백화점 옆'문화의 거리'에서였다.

말이 문화의 거리지 노래구절(“빗자루 한마리 쓰레기 두마리 뽀시시 아가씨”)처럼 우리 주변의 흔해빠진 거리풍경이 이들의 무대였다.5분마다 굉음을 울리며 전철이 지나가고 풀빵처럼 똑같은 간판.빌딩과 사람들로 가득찬 곳.동일성과 반복성으로 상징되는 일상 한가운데서 이들의'바보버스'가 시동을 걸었다.

청중주변을 빙 둘러싼 경찰들의 존재가 이 풍경의 바보스러움을 배가시켰다.

안전을 위한 당연한 조치겠지만 콘서트장에 경찰들이 버티고 선 위압적 풍경은 문화적 잣대로 볼 때는 확실히 후진국 수준이다.

뜨거운 공연장의 열기속에 애써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찰의 모습은 청중과 보이지 않는 갈등을 형성한다.둘 사이에 흐르는 서먹한 기운은 아무래도 청중의 자유로운 공연 참여를 은연중 방해한다.이날 공연에서는 바로 이런 바보스런 풍경을 꼬집는 돌출적 패러디가 연출됐다.흥이 오른 리드보컬 고구마가 청중에게“앞으로 나오세요”라고 외쳐버린 것이다.흥분한 청중이 무대로 돌진하자 주변을 장승처럼 에워싸고 있던 경찰이 청중 사이를 파고들어 시위진압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유쾌한씨의 껌씹는 방법'이 열창되는 가운데 경찰과 청중이 한덩어리로 뒤섞여버린 카오스적 풍경은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른채 정신없이 달려가는 바보버스 안의 혼란과 흡사해 보였다.이날 삐삐롱스타킹은 공연자와 청중사이에 경찰이 낀 한국만의 독특한 무대상황을 조롱하는 또한번의 파격을 감행했다.공연하면 안전부터 생각해야 하는 어른들이라면 의당 눈살을 찌푸리겠지만 경직된 풍경화로 메워진 우리 사회를 한번 뒤틀어서 보고싶은 사람들에게 이번 무대는 잠깐이나마 신선한 해프닝이 돼준듯 싶다. 〈강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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