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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In&Out 맛난 만남] 요리 영화 찍는 장윤현 감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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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주인공은 젊은 여성 요리사. 작지만 정통 프랑스 요리를 선보이는 레스토랑을 내는 것이 소원이다. 징검다리를 건너듯 꿈을 향해 한 발씩 내딛는 과정을 따라간다. 달콤쌉싸름한 연애도 빠질 수 없다. 멜로와 요리, 맛과 사랑. 어깨를 나란히 기대고 앉은 연인들을 미소짓게 만들 근사한 프랑스 요리 같은 이야기.

장윤현의 다음 영화는 바로 그런 이야기라 했다. 지금 마주 앉은 작은 레스토랑이 무대다. 기와 지붕을 얹은 작은 한옥, 통 유리창 너머 따스한 햇살이 하얗게 꾸민 실내로 스며든다. 안동의 어느 한옥 대청마루에서 뜯어온 나무로 만들었다는 테이블을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속 한 장면에 초대된 느낌이다. 지난해 가을 처음 왔을 때, 아늑한 분위기와 향료를 자제한 솔직한 음식 맛에 반했단다. 이곳을 모델로 영화 촬영 세트를 꾸밀 계획이다.

"잘한다는 프랑스 레스토랑들을 찾아다니며 먹어보고, 책과 자료를 뒤지며 요리 공부를 하죠. 영화가 완성될 무렵에는 프랑스 요리 한두 가지쯤은 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하하."

스테프들과 점심을 먹은 뒤라 아쉽다면서도 애피타이저로 나온 새우 프왈레와 비스크 수프를 깨끗이 비운다. 크림으로 맛과 농도를 조절해 걸쭉하면서도 느끼하지 않은 수프 맛을 칭찬한다. 이곳엔 암호 같은 불어로 기를 죽이는 두터운 메뉴판이 없어 좋단다. 레스토랑 입구 조그만 칠판에 적힌 '오늘의 메뉴'가 전부인데, 그날그날 좋은 재료에 따라 매일 바뀐다. 오늘의 메인 요리는 '두 가지 소스의 안심 스테이크'. 그가 고기를 미디엄 레어로 주문하라고 권한다. 쇠고기의 가장 부드러운 부위인 안심은 너무 바싹 익히면 안 된다. 육질이 부드럽고 지방이 별로 없어 빡빡해지기 쉽기 때문.

1997년 화제의 데뷔작 '접속'과 99년 '텔미썸딩', 지난해 개봉한 액션 스릴러 '썸', 그리고 제작자로 나선 '꽃섬', '와일드 카드'와 '알 포인트'까지 그의 영화는 여러 방향으로 뻗어 있다. 스스로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본 것 같다"고 자평한다. 최고의 흥행감독으로 꼽히기도 했고 아쉬운 실패작도 남겼다. 세련된 멜로에서 하드코어까지, 신인에서 노련미 넘치는 배우까지 골고루 겪어봤다. 폭넓은 관심사가 영화를 얕게 만들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아직까지는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일이 즐겁다.

변하지 않는 것은 '영화야말로 대중과 가장 잘 소통할 수 있는 도구'라는 생각.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80년대 후반, 영화 동아리 장산곶매에서 '파업 전야'같은 독립영화를 만들 때부터 가졌던 믿음이다. 영화는 "많은 사람과 동시다발적으로 접속하기"이자, "생각을 표현해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가장 힘있는 매체"라고 강조한다. 음식 영화를 차기작으로 고른 것도 같은 맥락이다. 몇 년 전 잘 차려진 프랑스식 정찬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내용의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본 뒤 맛으로 교감하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친해지고 싶은 상대에게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관심을 표현하잖아요. 특히 오랜 시간에 걸쳐 같은 맛을 나누며 느긋하게 대화하는 프랑스식 음식 문화는 '소통'을 위한 과정을 보여줄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육즙이 풍부한 안심 스테이크가 부드럽게 입 안에서 녹는다. 곁들여진 버섯과 아스파라거스가 향을 더한다. 말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디저트로는 제과사의 수호신을 상징하는 케이크인 생토노레가 나왔다. 생크림과 폭신한 빵, 딸기가 섞여 새콤달콤한 조화를 이룬다.

진한 커피 한 모금으로 단맛에 달떠 오른 입안을 진정시키며, 그가 오랜 기억 속의 맛을 끄집어낸다. 어릴 적 친구네 집에서 먹었던 저녁이다. 넉넉해 보이는 살림이 부러웠다. 처음으로 먹어 본 카레의 매콤한 맛이 그 가족의 풍요로운 이미지와 뒤섞였나보다. 다 자랄 때까지 '근사한 저녁식사'하면 카레 냄새를 먼저 떠올리곤 했다. 또 하나 생생한 기억은 시골 고모댁에서 먹었던 닭 무침.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위해 씨암탉을 잡던 고모의 모습과 초가 지붕 위로 피어오르던 흰 연기가 아련하다. 요즘도 닭 무침을 하는 집이 생기면 빼놓지 않고 가 보지만 그때 그 맛은 나지 않는단다. 감정으로, 추억으로 감싼 맛이기 때문일 게다.

영화 '바베트의 만찬' 마지막 장면. 극도로 금욕적인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최고의 프랑스 정찬을 선물한 뒤 주인공 요리사는 부엌에 홀로 남는다. 오래전 영화지만 허무한 듯 행복한 그 모습은 뚜렷이 떠오른다. 올해 말 새 영화를 완성한 뒤, 그가 최선을 다해 만족스런 식사를 대접한 요리사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본다. 탁자 건너편에서 그가 유쾌하게 웃는다. 관객들이 영화관을 나서며 '소중한 누군가와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도 더 바랄 것이 없겠단다.

신은진 기자

*** 장윤현 감독과 함께 간 아따블르

한가로운 삼청동 뒷골목에 숨어있는 작은 한옥. 아따블르는 프랑스어로 '밥 먹으러 오라(A Table)'고 부르는 말. 점심 코스 3만원,저녁 코스 4만5000원(부과세 10% 별도). 내실 하나에 테이블 6개뿐이라 미리 예약을 해야한다. 총리공관에서 50m,우리은행 뒤편. 02-736-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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