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이래서야>3. 줏대가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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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위기감이 느껴진다.어쩐지 불안하다.우리의 자리는 어디이며,어디로 가고 있는가? 아니,우리는 도대체 누구이며 우리의 줏대는 과연 무엇인가?

경제가 언제 폭삭할지도 모르겠고,예측할 수 없는 북한문제와 가까이 다가오는 대권싸움,백주에 권력층의 경악스러운 부패가 드러난 정계가 극히 불안정하다.

민중성과 저속성을 혼돈하는 대중문화,새로움과 미국의 천박한 대중문화가 동일시된 경박스러운 신세대 문화,서구사상의 맹목적 수입과 추종을 벗어나지 못한 사상계,사치와 품위를 착각한 졸부들의 저속한 풍조,무조건 외래품 선호로 나타난 사

대적 심리등이 우리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게 한다.때로는 상품광고로 착각할 만큼 변질된 언론매체들이 이러한 풍조를 오히려 추종하거나 부추긴다.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우리가 자랑했던 경제적 풍요가 거품이고,한국인의 머리가

가발이며,그 얼굴이 가면이라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인가?

예술이 오락이 됐고 예술가가 개그맨을 뜻하게 됐다면 이제 우리 문화의 향방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의 대표적 사상이 곧 서구에서 유행하는 사상의 수입.모방.추종이라면 우리의 지적 정체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모든

얘기가 거짓이고,모든 사람들이 사기꾼이나 도둑놈으로만 보이게 됐다면 우리의 도덕성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 것인가?

모든 것이 혼탁하고 뒤죽박죽된 상태에서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됐다.극심한 세계적 변화의 와중에서 우리의 앞날이 더욱 불투명해졌다.마음 깊은 곳에 허탈한 공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우리는 정신적으로 빈곤하다.

생각보다 정신적 위기는 훨씬 심각하다.정신적 빈곤은 곧 자주성의 부재다.따라서 일부 지식인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처럼 정신적 빈곤을 이유로 자주성을 은폐할 수 없다.마찬가지로 상업주의적 대중문화 생산자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문화

적 저속성이 민중성이나'세계화성'으로 포장될 수 없다.졸부들의 천박한 논변에 나타나는 것처럼 사회적 공익에 위배되는 사치스러운 과소비가 개인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변명될 수 없다.

그렇다고 서구사상의 맹목적인 성급한 모방과 추종이나 무조건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복고주의로 자주력의 빈곤과 창조력의 부재를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더욱이 어디서 주워들은 철학적 괴변으로 도덕적 부패와 무감각을 합리화할 수 없

음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위기는 곧 우리 정신의 위기다.현재의 위기는 우리의 정신적 빈곤과 타락,즉 문화적 줏대의 상실에 기인한다.우리의 정신적 줏대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개인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뼈대가 있어야 한다.우리가 희망을 걸 수 있는 줏대는 보다 철저한 자주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력,보다 의젓하고 점잖고 품위있는 미학적 감각,당당한 자존심을 갖춘 보다 철저한 도덕적 감수성이다.우매하고 천박하고 악한 것과 싸우는데서 인간의 존엄성,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정신적 무장이 필요한 때다. 박이문〈포항공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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