憤삭이고 숨고르는 민주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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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신한국당 민주계가 숨고르기를 하고 있다.

검찰이 공개한 정태수 리스트에 대해 그동안 음모론을 주장하며 거세게 반발하던 움직임에서 한발 뒤로 빼고 있다.

이회창(李會昌)대표의 정치력을 가차없이 비판하던 기류도 주춤하고 있다.고비가 된 것은 12일 63빌딩에서 열린 민주화세력 모임 12인회의였다.

한 참석자는“할 수 있는 얘기는 다 나왔다”고 했다.심지어 “김영삼(金泳三)대통령과 당 지도부가 현철(賢哲)이 문제를 무마하기 위해 애꿎은 민주계를 희생양으로 삼는다”며 대통령에 대한 서운함도 표출됐다.“민주계 대선주자를 정리하기

위해 정태수 리스트가 악용되고 있다”는 음모론도 제기된 것으로 알려졌다.

다른 참석자는“당 지도부가 소속의원들의 정치생명이 걸린 문제에 대해 아무런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는 성토도 있었다”고 전했다.

그러나 회의후 발표된 성명서는 이런 것들이 반영돼 있지 않았다.심지어 성명서중 당 지도부를 비난하는 대목은 서석재(徐錫宰)의원의 발표때 생략됐다.

이렇게 된 이유는 참석자들 간에“논의사항이야 어떻든 검찰수사에 반발하는 모습으로 여론에 비쳐지는 것은 좋지 않다”는 의견이 모아졌기 때문이다.그래서 이들은 감정을 안으로 삭이는 대신 내부단합에 진력하기로 했다.

한 중진의원은“이제 더이상 잃을 것이 없는 만큼 뭉치는 일만 남았다”고도 했다.단합의 가시적인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민주화세력 모임은 여의도에 물색한 사무실 세군데중 한군데를 정해 조만간 개소식을 가질 계획이다.

사무실 마련은 민주계가 한 자리에 모일 수 있는 공동의 장(場)이 생긴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김운환(金운桓)의원은“사무실을 개소하는대로 조직화 작업도 본격 전개할 것”이라고 했다.이를 위해 간사장을 맡고있는 서석재 의원외에 실무위원등을 보강하고 몇개의 분과도 두기로 했다.민생관련 활동에도 나설 계획이다.그동안 단합의 장애

물이었던 사조직 모임을 자제키로 한 것도 새로운 움직임이다.

徐의원측은 나사본을 개칭한 21세기 민주연합 창립식을 당분간 연기하기로 했으며 민주산악회도 17일 갖기로 했던 시산제를 연기했다.

특히 민주계의 숨고르기는 李대표와 徐의원의 12일 오후 단독회동과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李대표는 오전에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뒤 곧바로 徐의원을 만났다.

두 사람은 이 만남에서 음모론을 포함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다.이를 계기로 李대표와의 갈등전선도 일단 잠복될 전망이다.

그러나 민주계의 이런 숨고르기가 언제까지 유지될지는 의문이다.의원들이 계속 소환되고 있고 언제든 불만이 다시 폭발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한보청문회 과정에서 민주계가 다시 상처를 입을 수도 있다.

특히 현철씨 문제 처리과정에서 민주계가 다시'속죄양'이 된다는 의구심을 갖게 되면 상황은 매우 복잡해질 것이라는게 민주계 인사들의 시각이다. 〈박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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