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청론>은행의 바로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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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은행가란 날이 쨍쨍 맑을 때에 우리한테 우산을 빌려주었다가 비가 올 때쯤에는 자기 것이니 돌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이다.'

얼마 전 은행들이 준법대출을 하겠다고 나섰을 때 생각난 미국의 소설가 마크 트웨인의 말이다.한보사태에 관련된 은행임직원이 담보가 부족한데도 대출했다고 해서 직무유기혐의를 받게 되자 일부 은행에서는 법과 규정을 꼭 그대로 지키기 위

해 신용대출을 취급하지 않겠다고 반발하고 나섰다는 것이다.가뜩이나 움츠러진 자금시장은 더욱 경색되었고 연쇄부도설이 난무하게 되면서 은행에 대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요즈음은 은행원 수난의 시절인 것 같다.갖가지 사고와 비리 때문에 수많은 은행장들이 자리를 물러섰고 이중 여러 명은 구속당하기까지 했다.한보부도 이후 은행의 대외공신력이 급락해 해외지점들이 자금조달에 애를 먹고 있다.국내에서

도 신인도를 떨어뜨리는 일이 연이어 발생했다.얼마전에는 은행원들이 자기은행으로부터 저금리로 특혜대출받는 주택자금 대출규모가 지나치게 방대하다는 보도가 있었다.

또한 최근에는 한국은행 임직원들이 여러 은행으로부터 무담보 신용대출을 받았음이 감사원에 의해 지적된바 있다.이런 일들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국민들은 우리금융의 낙후성과 은행 부실채권의 책임을 주로 정부에 집중적으로 추궁해왔다.바로

관치금융 때문에 은행의 생산성이 떨어지고 금융의 국제경쟁력이 바닥을 헤매는 것으로 믿어왔던 것이다.그러나 지금은 은행 자신의 책임도 작지 않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가는 듯하다.

경제의 심장과 혈관에 해당하는 은행이 계속 이런 모습을 보여서는 안될

일이다.뼈아픈 자기성찰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야 우리경제에

한가닥 희망을 줄 수 있게 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생산성이 일본 시중은행의 10분의 1밖에 안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하겠다.일반기업에서 하는대로 기구와 사람을 줄이거나 재배치하는 경영혁신의 노력없이는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 흡수합병의 운명에 처하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다음으로 고객에 대한 서비스의 질을 높이는 일이 긴요하다.그동안 임자없는

경영환경아래서 과점적인 지위를 누리다 보니 은행은 기업이나 가계에 대해

관료적인 고자세로 임해 온 감이 있다.사실 사안 자체로 보아 그다지 큰 것이

아닌 행원의 주택자금대출이나 한은 직원들의 신용대출이 문제화된 것은 어떻게 보면 그간 은행에서 푸대접받던 고객들의 분노가 표출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대고객 자세를 고쳐야만 경쟁력과 신인도의 향상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 은행이라면 이제는 제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것이다.금융자유화는 지금까지 항상 학계나 기업이 앞장서서 정부에

대해 요구하고 나섰다.정작 당사자인 은행들이 뒷짐지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민주화되어 가

는 사회에서 엘리트들의 대규모집단인 은행으로서는 당연히 그래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우리 은행들은 지금으로부터 꼭 25년 전 정부에 의해

직원 봉급이 50~60% 삭감당하는 수모를 겪은바 있다.요사이 논의되는 정부의

금융개혁이라는 조치로 인해 또다른 수모가 닥치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스스로 환골탈태하면서 개혁을 앞질러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노성태 (한화경제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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