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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만의 위기’에 리더십은 안 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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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호 24면

2008년의 경제 키워드는 단연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에서 비롯된 글로벌 금융위기다. 세계 경제 중심지 미국에서 3월 베어스턴스에 이어 9월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면서 세계 금융시장을 뒤흔들었다. 이후 세계 최대 보험사인 AIG와 국책 모기지 회사인 패니메이·프레디맥이 잇따라 휘청대고, GM·포드·크라이슬러 자동차 ‘빅3’ 등을 비롯한 실물경제도 본격적 침체에 빠져들었다.

인물로 돌아본 2008년 경제

중앙SUNDAY는 일찌감치 구조적 원인에서 비롯된 위기가 깊고 길게 갈 것임을 경고했다. HSBC가 대규모 상각을 발표하며 시작된 서브프라임 사태가 꼭 1년이 된 2월 10일 내보낸 기사가 대표적이다. 3월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은 투자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주식 투자로 연 10%의 수익을 얻으려면 2100년 다우존스 지수가 2400만 포인트가 돼야 한다”며 이미 꺼지기 시작한 버블에 대한 환상에서 빨리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베어스턴스 매각 이후 세계 증시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거침없는 유동성 랠리를 펼칠 때도 중앙SUNDAY는 폴 베이트먼 JP모건자산운용 회장(5월 25일자), ‘닥터 둠’ 마크 파버(6월 29일자), 버블 분석의 대가 에드워드 챈슬러 GMO 수석 이코노미스트(7월 13일자) 등의 인터뷰로 ‘금융위기가 이제 시작’이란 메시지를 전달했다. “금융위기의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전은 으레 전반전보다 터프하기 마련”(8월 31일자 전광우 금융위원장), “한국 부동산도 꺼지기 시작했다”(7월 20일자 김광수 경제연구소장)는 전망도 맞아떨어지고 있다.
 
워런 버핏 “버블 환상 빨리 벗어나야”
그런데도 정부는 위기의 심각성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10년 만에 야인에서 경제 사령탑으로 변신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고환율 정책과 물가 지도 등 시장 개입을 남발하고, 앞뒤 안 맞는 정책을 1970년대 새마을운동 방식으로 밀어붙여 지면의 단골손님이 됐다. 최중경 전 재정부 차관은 시장의 원성을 달래기 위한 희생양이 됐다. 이성태 한국은행 총재마저 물가관리라는 중앙은행의 전통적 역할, 재정부와의 기 싸움에 매달리면서 경제팀이 따로 노는 인상을 줬다.

덩치가 커지고 체질도 강해졌다던 은행은 한국 경제의 취약한 고리임이 드러났다. ▶해외에서 돈을 벌어오는 게 아니라 국내에서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영업하는 칸막이 안의 안일함(4월 27일자 김봉수 키움닷컴증권 사장 인터뷰) ▶대주주가 아니면서 황제경영을 해 온 은행장들의 행태(10월 19일자 ‘은행장들 위기의 계절’)가 잇따라 지적됐다.

95세로 타계한 ‘20세기 최고 투자자’ 존 템플턴 경의 생애(7월 13일자)는 탐욕과 무절제에 빠진 시장에 금융가의 역할과 행복의 조건을 되돌아보게 했다. 가치투자와 역발상 투자, 유연한 자세를 강조했던 그는 젊은 시절 소득의 절반을 무조건 저축하고 주당 80시간씩 일하는 한편 90세까지 날마다 한 시간씩 수영을 하는 평범한 시민이었다. 10억 달러 이상의 재산을 사회에 기부했던 그는 자녀에겐 한 푼의 유산도 남기지 않았다.

‘마이크로소프트 제국’을 건설한 빌 게이츠의 은퇴 연설(6월 29일자)도 기본의 중요함을 일깨웠다. 그는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가장 위험하다. 중요한 것은 덩치를 키우는 게 아니라 더 빠르고 유연해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최태원 SK 회장 “경영 성적 B학점” 자평
하지만 템플턴이나 게이츠 같은 사람은 흔치 않았다. ‘월가의 살찐 고양이들’로 불려온 금융회사의 수장들과 고액 연봉을 누려온 제조업체 CEO들은 무너져 가는 돈의 탑을 떠나기보다 차라리 깔려 죽는 길을 선택했다. 리먼브러더스를 14년간 좌지우지해 온 풀드(8월 24일자), 경영권에 집착한 제리 양 야후 CEO(8월 3일자), 로만 아브라모비치 같은 러시아 신흥재벌 울리가르히(11월 16일자) 등이 그들이다. 월가의 거물 메이도프의 금융 다단계 사기(폰지 파이낸싱, 12월 21일자)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탐욕의 끝자락을 극명하게 보여 줬다.

과감한 투자에 나섰던 국내 CEO들도 거품 붕괴의 후유증으로 고생해야 했다. 특히 인수합병(M&A)에 공격적으로 나섰던 이들이 ‘승자의 저주’의 희생양이 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제2 창업을 한다는 각오’(4월 20일자)로 대우조선해양 인수전에 나서 포스코·현대중공업·GS 등을 제치고 승자가 됐다(10월 26일자). 하지만 당초 계획한 자금 마련이 차질을 빚으면서 최악의 경우 3000억원의 계약금을 포기하고 물러서야 할지도 모르는 처지가 됐다. 지난해 대우건설에 이어 연초 대한통운을 거침없이 인수했던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4월 6일자)도 주가 하락으로 재무적 투자자에 대한 수익 보전액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우울한 연말을 맞고 있다.

재계 1위 삼성은 올해 큰 시련을 맞았다. 비자금 사건으로 이건희 회장이 퇴진하고 그룹전략기획실이 해체되면서 새 경영체제 실험에 들어갔다(4월 27일자). 그룹 구심점 역할을 사장단협의회가 맡게 됐지만 이 회장 체제만큼 강력한 리더십을 기대하기 힘들어 글로벌 경쟁력을 어떻게 키워 갈지 지켜봐야 할 상황이다.

 정몽구 현대·기아자동차 회장은 올해 해외 출장이 가장 잦았던 경영인으로 꼽힌다. 인도 첸나이 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정 회장을 취재해 글로벌 경영 구상을 짚어 봤다(2월 3일자). 최근 GM·포드·크라이슬러 등 미국 자동차 ‘빅 3’의 파산 위기로 세계 자동차 산업 재편이 불가피해짐에 따라 정 회장의 행보도 더 바빠질 전망이다.

 지난 8월 최종현 회장 10주기를 맞아 최태원 SK 회장의 10년 경영 성적표를 분석해 봤다(7월 13일자). 최 회장은 기자의 질문에 “B학점은 되지 않을까”라고 자평했다. 최 회장은 최근 광복절 때 사면·복권된 손길승 전 회장을 SK텔레콤 명예회장으로 복귀시켜 그룹 미래 구도를 함께 그려 갈 것으로 알려졌다(12월 7일자).
 
김석동 전 차관 “외환 시장 사수” 강조
“100년 만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위기”(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라지만 전 세계 정부와 기업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도 대통령과 장관 말이 다르고, 일관된 철학과 액션플랜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이한구 전 한나라당 정책위 의장, 5월 4일자). 자발성보다 위로부터의 압박에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지적도 많이 나왔다. 리더십의 중요성이 새삼 부각됐다. ‘권한은 아래로, 책임은 위로 돌리는’ 서번트 리더십으로 회사를 살려낸 정만원 SK네트웍스 사장(11월 30일자)은 20일 뒤 그룹 핵심 계열사인 SK텔레콤의 선장이 됐다. 상장사 가운데 직원 1인당 순익을 가장 많이 낸 이진방 대한해운 회장도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위임을 비결로 꼽았다(4월 13일자). “선장은 기관장이나 갑판장에게 미주알고주알 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해법에 대한 갈증도 커져 갔다. 김석동 전 재정경제부 차관은 “외환보유액을 다 퍼부을 각오로 한국 경제의 아킬레스건인 외환시장을 지켜야 한다”며 시스템 붕괴를 막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했다(9월 21일자). 이철휘 자산관리공사 사장은 외환위기 때보다 적극적인 부실 선제 대응과 고용시장의 안정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12월 14일자). 국내 미시경제학의 최고봉인 이준구 서울대 교수는 “땅 파지 말고 복지·교육에 예산을 쓰라. 종부세 완화는 잘못됐다”며 정부의 토목 마인드와 고소득층 편중 정책을 비판했다(12월 21일자). “벤치와 가로등을 바꿀 돈으로 수출 중소기업의 디자인을 지원하라”고 한 영국 디자인 회사 탠저린의 이돈태 사장의 충고(3월 9일자)도 보여 주기식 정부 정책에 경종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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