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삶을 태워 노래하고 나비처럼 간 사람”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월간중앙 수많은 히트곡을 작곡했고, 가수로도 활동했던 김정호. 그는 짧은 삶을 살았지만 그 음악의 영향력은 한국 가요계의 흐름을 바꾸고도 남을 만했다. 올해 열린 공연까지 합하면 총 다섯 번의 헌정공연이 그의 음악혼을 기리기 위해 열렸다.

관련사진

photo

1985년 11월29일. 그리고 2008년 11월28일. 정확하게 23년의 시공간.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궁금해할 것 같다. 1970년대 한국 대중음악사에 새로운 이정표를 제시했던 김정호의 사후 활동시간표다.

한국 가수 중 최다 헌정공연 받아… “우리 소리를 찾아 헤매던 슬픈 천재”

1985년 그날은 그가 지병인 폐결핵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해이고, 2008년은 특정 뮤지션으로서 사상 최다 헌정공연을 헌사받은 날이다.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사후에 추모공연을 헌사받을 가치가 있는 뮤지션이 되고 싶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국내 대중음악 헌정공연사에 전인미답의 기록을 세운 김정호는 또 하나의 전설로 추앙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국내에서 헌정공연을 헌사받은 작고 대중음악인으로는 김광석·유재하·김현식과 작곡가 이봉조·이영훈이 있다. 신중현과 한대수, 록그룹 산울림은 생존가수임에도 이미 헌정공연의 주인공이 된 살아있는 전설들이다.

1986년 5월 김정호의 첫 추모공연이 서울에서 열렸다. 1주기에 맞춰 추모음반까지 나왔다. 그 음반은 대중가요사상 최초의 헌정앨범으로 공인돼 방송사로부터 음반기획상을 수상했다. 김정호는 최다 헌정공연의 주인공이자 최초로 헌정앨범을 헌사받은 주인공이 됐다. 헌정앨범의 지평을 연 뮤지션인 셈이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2003년 11월.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던 그날 서울 명동에서 그의 두 번째 추모공연이 열렸다. 2006년 11월25일에는 서울에서 남성 듀오 ‘4월과 5월’ 3기 멤버로 함께 활동했고 그에게 가수 데뷔의 길을 열어주었던 백순진이 세 번째 추모공연을 열었다.

올해는 지난 4월 그의 고향 광주에서 열린 광주청소년음악페스티벌 행사 때 열린 헌정공연에 이어 11월28일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주관으로 진행된 김정호음악회까지 두 번이나 열렸다. 개인 뮤지션을 위해 선후배 가수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무려 다섯 번의 헌정공연을 열었다는 사실은 대중가요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나는 김정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세상을 떠난 지 23년이나 된 대중가수를 지금도 잊지 못한다면 이상한 일일까? 만난 적은 없지만 그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주옥 같은 그의 노래 때문이다. 수줍고 말수가 적었던 그는 오래 전에 떠났지만 그의 애절한 노래는 지금까지 친구가 되어주고 있다.

만나보지도 못한 가수가 그리워 가슴이 먹먹해지고 그리움에 몸살을 겪는 마법 같은 일은 대중가요가 발휘하는 최대의 미덕이 아닐까? 내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던 1974년. 그의 데뷔곡 <이름 모를 소녀>가 살포시 다가왔다. 최근 한 공중파 방송의 설문조사에서 ‘7080세대가 선정한 명곡 베스트 10’에 선정된 이 노래는 당대의 대중가요와는 확실히 차별됐다. 어쩌면 이렇게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하는 슬픈 노래가 있었던가?

관련사진

photo

2008년 11월28일에 열린 다섯 번째 김정호 추모공연.

다섯 번의 추모공연이 바쳐진 이름, 김정호

사실 이 노래는 사랑했던 친구 여동생을 위한 일종의 작업송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식 데뷔도 못한 가수지망생을 반길 집안은 없었을 터. 맺지 못할 것 같았던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삐그덕거렸지만, 진정성을 담은 그의 노래는 결국 그 여동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어주는 마술을 발휘했다.

김정호는 단숨에 청소년들의 우상으로 급부상했다. 그 열기는 1974년 11월 같은 제목의 영화 개봉으로 이어졌다. 이 영화로 데뷔한 여주인공 정소녀(본명 정애정)는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노래 제목에 착안해 예명을 ‘소녀’로 지었을 정도였다. 1973년 발표돼 이미 폭발적 반응을 얻고 있던 남성 듀오 ‘어니언스’의 히트곡 <작은 새><사랑의 진실><외기러기><저 별과 달을>이 모두 그가 작곡한 노래들로 밝혀지면서 김정호는 돌풍의 핵으로 떠올랐다.

김정호. 드라마틱하게 짧은 삶을 살다 간 그의 등장은 1970년대 대중음악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몰고 왔다. 지그시 눈을 감고 한을 토해내듯 하던 그의 노래는 가슴 시리도록 슬픈 가락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낯선 이름이겠지만, 그의 노래가 40대 이상 중·장년층의 정서에 새겨놓은 흔적은 짧게 정리하기 어려울 만큼 지대했다.

대표곡 <이름 모를 소녀><하얀 나비>는 감수성 예민한 당대 소녀 팬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사랑의 진실><작은 새><푸른 하늘 아래로><외길><저 별과 달을><님><꽃잎><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등 그가 남긴 수많은 히트곡은 젊은 학생층에 국한됐던 기존의 포크송을 온 국민을 대상으로 넓히며 시대정신이 됐다.

그는 너무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의 비범한 재주에 신조차 질투가 솟았던 것일까? 너무 젊은 나이에 빼앗긴, 그가 그려낸 노래세상은 온통 그리움·고독·슬픔·이별 등으로 뒤범벅된 잿빛 삶의 반영이었다. 1970~80년대 그 누구도 마음 깊은 곳으로 집요하게 파고드는 김정호의 처연한 노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의 진정한 가치는 최고의 인기가수였다는 사실보다 ‘우리 소리’를 찾는 소리꾼이었다는 점에서 발견해야 한다. 애절하면서도 소름 돋는 독특한 그만의 샤우팅 창법은 압권이었다. 고요함과 가슴 벌렁거리는 격정이 어우러졌던 그의 창법은 사후 후배 뮤지션들의 따라 부르기의 전형이 됐다.

사람을 얼어붙게 하는 강한 호소력만큼이나 “너무 어두운 곡”이라는 일부의 배척도 있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처절하고 슬픈 멜로디는 오랫동안 온 나라를 조용하게 진동시켰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김정호는 전남 광주시 수창초등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뇌염에 걸려 사지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어린 시절 김정호는 밥상 위에 올라가 연설 흉내를 내는 등 웅변에 재능을 보였다. 중·고등학생이 되어서는 인정 많고 활달한 성격이 점차 말수가 줄고 어딘가 한이 맺힌 인상으로 변해가며 고독을 즐겼던 조숙한 아이였다. 싱어송라이터인 그의 포크와 가요의 경계를 넘나든 노래들인 <이름 모를 소녀>와 <하얀 나비> 등은 당시 TV와 라디오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서 매주 1위를 차지했다.

이는 그의 애끊는 창법과 한국적 정서가 녹아든 한스러운 노래들이 얼마나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았는지를 방증한다. 그는 포크 본래의 순수성을 주장하는 이들로부터 “포크의 수준을 가요의 수준으로 낮췄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분명 포크송과 유행가요의 경계를 허물고 대중음악의 지평을 넓힌 새로운 음악어법의 제시였다.

절친했던 ‘어니언스’의 임창제는 오래 전 “당시 정호는 잠들었다 새벽녘에 깨어보면 늘 기타를 끌어안고 있었다. 작은 체구였지만 방 한구석에 정좌한 자세로 열심히 기타를 치던 모습은 대단했다. 남에게 조금이라도 기타 실력이 뒤진다 싶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극복하고 마는 완벽주의 스타일이다.

당시 북한산 등성이에 앉아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공부는 많이 못했지만 음악으로 세상에서 1등을 한번 해보자’며 아이들처럼 새끼손가락을 걸며 맹세하던 생각이 난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노래 가사처럼 좌절했던 방황의 시기

관련사진

photo

2003년 11월 열린 김정호 추모공연에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기타가 전시됐다.

공식 데뷔 전 무명 시절의 김정호는 비원 앞 잔디밭에서 노숙했을 만큼 힘겨운 세월을 보냈다. 1973년 12월 ‘4월과 5월’의 리더 백순진과 김태풍·김정호가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공식적으로 멤버 교체를 알리는 자리였다.

이미 어니언스의 히트곡을 통해 김정호의 재능을 인정한 지구레코드는 백순진을 통해 ‘4월과 5월’의 전속을 추진해왔다. 하지만 김정호는 “가수뿐 아니라 작곡가로도 전속하라”는 독소조항 때문에 거절했다.

결국 김정호는 DJ 이종환의 주선으로 팀을 탈퇴하고 유니버셜과 전속계약을 하며 솔로 가수로 독립했다. 그래서 아쉽게도 ‘4월과 5월’ 3기 음반은 존재하지 않는다. 1973년 양희은이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저 별과 달을>을 노래했을 때, 당시 중학생이던 음악 팬이 릴 테이프로 녹음한 공개방송 실황 음원이 유일한 것이다.

그의 음악인생에서 1975년은 영광과 좌절을 함께 가져다준 분수령이었다. 유니버셜레코드는 젊은층을 겨냥한 ‘영 패밀리’ 옴니버스 시리즈 음반의 1집부터 4집까지의 모든 재킷 표지를 김정호의 사진으로 장식했다. 그의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대마초 파동은 그에게도 음악적 사형선고였다.

힘겨운 시절 고통을 잊기 위해 빠져든 유혹은 자신의 노래 <작은 새>처럼 좌절과 방황의 힘든 고행길을 걸어야 했다. 금지의 세월은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인생을 성찰하며 진짜 소리 찾기에 함몰했던 값진 인고의 시간이기도 했다. 활동금지와 더불어 경제적 이중고까지 닥친 그에게 무교동 생음악 레스토랑 ‘꽃잎’은 1983년 재개발로 헐릴 때까지 그가 노래를 부른 유일한 무대이자 무명 포크 가수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고통과 인고의 세월 5년이 지나고 해금이 됐다. 1980년 3월 김정호는 재기 앨범 ‘인생’을 발표했다. 그러나 해금의 달콤함도 잠깐. 오랜 정신적 고통과 싸움에서 만신창이가 된 심신 때문에 그는 또 다시 활동을 중지하고 인천 송도 결핵요양원에 입원했다. 1년 이상 치료가 필요했다. 이때 착실하게 요양했더라면 그의 생명은 연장됐을지 모른다.

노래비 건립 위해 뛰는 후배들

요양원에서도 그의 머릿속은 멜로디로 꽉 찼다. 새벽에 우연히 머리가 헝클어진 한 여인이 쓸쓸하게 송도 해변을 걷는 모습을 보았다. 곧바로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라는 노래로 이어졌다. 그의 마지막 히트곡이다. 요양받아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의 가슴속에 강하게 꿈틀거리는 음악적 열정은 4개월 만에 요양원을 뛰쳐나오게 했다.

결핵균보다 강했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위대한 명곡을 탄생시켰지만, 결국 그를 사지로 몰고 간 주범이 됐다. 숨이 끊어질 듯 토해내던 김정호의 노래들은 단순한 대중가요가 아닌 한의 정서를 담은 국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의 음악적 DNA는 광주 외가 어른들의 국악을 통해 형성됐다. 그는 소리를 중시하는 지역 특성을 몸에 익히면서 성장했다.

동일창극단원이었던 어머니 박숙자는 명창 김소희와 쌍벽을 이뤘던 창의 명인이다. 한국전쟁 때 납북된 외조부 박동신은 광주가 낳은 우리 국악의 거인이다. 명창 김소희의 고수이자 인간문화재인 김동준, 국립창극단장 박우성 등이 그의 제자이며, <보국가><유관순전><해방가> 등 판소리 창작에도 큰 업적을 남긴 거목이다.

국립국악원 수석단원으로 아쟁을 연주했고 서울예전·전남대 등에서 국악 후진 양성에 몰두했던 박종선은 외삼촌이다. 생활처럼 귀에 달고 살았던 외삼촌 박종선의 아쟁소리는 김정호의 음악적 관심의 뿌리이자 시작이었다.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그는 국악에 자신의 음악을 접목하기 위해 아쟁·가야금·꽹과리를 치며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에 혼을 담아 내려 했다.

1983년 11월 발표된 그의 유작앨범 ‘LIFE’는 숨쉬기조차 힘든 가운데 8개월의 최장시간 녹음을 기록한 그의 마지막 정규 앨범이다. 대중음악과 국악의 완벽한 접목을 구현한 <님>은 난산 끝에 탄생한 명곡이다. 탄식의 이미지를 가득 담은 이 노래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상여가락을 연상시킨다.

소름 돋는 섬뜩함을 느끼게 하는 이 노래는 온몸을 불사른 김정호의 마지막 불꽃이었고, 그에 대한 재평가의 담론을 출발시킨 접점이었다. 흰 눈이 펑펑 쏟아지던 1985년 11월29일, 33세의 김정호는 ‘하얀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갔다. 사랑했던 부인에게 “고생시켜 미안해”라는 애틋한 유언만 남긴 그는 경기도 파주의 기독교공원묘지에 안장됐다.

2000년대에 들어 지방자치시대가 본격화하면서 생겨난 새로운 문화가 있다. 지역을 배경으로 했거나 지역이 배출한 중요 가수의 노래비 건립이다. 배호의 경우는 이미 4개의 노래비가 건립됐다. 생존가수인 최백호도 ‘영일만 친구’ 노래비가 있다. 그러나 김정호는 아직 정식 노래비가 없다. 다섯 번째 추모공연의 수익금은 그의 노래비 기금으로 사용될 예정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그는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대표곡 <하얀 나비>의 “때가 되면 다시 필 걸. 서러워 말아요~”라는 노래 구절처럼 그의 영혼은 ‘하얀 나비’가 되어 자신을 그리워하는 대중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순백색 날갯짓을 하고 있다.

글■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역임. 전 <한국일보> 기자이자 프로 사진가. 7080 음악열풍을 주도한 공연기획자. 희귀 음반을 비롯한 대중문화자료 수집가. KBS·SBS·CBS·교통방송 등에서 음악프로그램 진행. 현재 대학에 출강하는 한편, 각종 신문·잡지·사보에 대중문화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J-HOT]

▶ 이재오 출마 결심, 이명박-박근혜 갈등 '뇌관'

▶ 홍드로 "공 던지러 가지 몸매 뽐내러 가는게 아냐"

▶ USB 지고 □□□□ 뜬다

▶ '비아그라'의 아성에 도전하는 토종 변강쇠

▶ 대통령 '저주 인형' 만들어 파는 나라

▶ GM대우 20년 "한두 달이면 복직되겠지 싶었는데…"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