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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으로가는간이역>21. 경북 안동시 무릉역 (1)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지상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는가.속세의 시름이 자취없고 시간은 복사꽃잎을 적시는 냇물처럼 아득히 흘러가는 곳.이름만 있고 실상은 없다는 곳.

뜻밖에도 경북 안동에 무릉이 있었다.안동시남후면무릉동.시내에서 대구방향으로 20리도 채 안되는 거리지만 안동사람들조차“거기 역이 있던가”하고 되물을 만큼 명색만 남은 간이역에 무릉역이란 간판이 걸려있다.

무릉역은 종일토록 화물차량만 57차례나 드나든다.승객을 실은 비둘기호가 매일 세차례 서기도 하지만 이는 인사치레다.이곳에 내리는 승객수라고 해야 이틀 사흘거리로 고작 한두명.매표창구도 아예 없다.간이역의 겨드랑이는 무척 비좁다.역

사 양쪽에 바짝 붙은 큼직한 시멘트공장과 정유공장 탓이다.골리앗처럼 위압적인 공장들 사이에 낀 초라한'무릉'.

“그래도 산천이 좋아서'무릉'아니겠습니까?낙동강 지류인 미천(眉川)이 흐르지요,그 주변엔 암산보트장.무릉랜드가 있어 안동시민들의 휴식처 역할을 하지요.”

김기현(58.남후면사무소 총무계장)씨의 말.

무릉역 건너편 미천이 눈썹(眉)처럼 둥그렇게 야산을 감돌아나간 가운데 미천 오른쪽 절벽엔 검붉은 퇴적층이 20이상 솟아 땅의 단면을 내보이고 있다.무릉이 애초 중국(허난省 타오위안縣)에서 비롯됐으니 이곳도 굳이 붙이자면 작은 '적

벽강'(赤壁江.중국 후베이省 자위縣)은 된다.

그러나 정작 이곳의 압권은'무릉랜드'란 놀이공원이다.동양적 상상의 세계,외지인을 거부하는 무릉이 사람을 끌려는'랜드'로 탈바꿈했다.'랜드'는 미국 디즈니랜드를 모범으로 하는 현대판 무릉도원이다.산업자본과 첨단기술,즉물적 상상력이

결합된 행복의 생산공장.서양의'랜드'가 동양의 '무릉'과 결합됐다.

풍차를 닮은 무릉랜드의 허니문카는 대구로 향하는 5번 국도상 야산 정상에 위치해 10㎞ 바깥에서도 잘 보인다.2천5백평 규모에 바이킹등 8가지 시설을 갖춰 지방 놀이공원치고는 작지 않은 편.그러나 여기'풍차'도 필경은 인사치레다.

무릉랜드가 경영난 끝에 지난 겨울부터 장기휴장(6월까지)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안돌아가는 것이 어디'풍차'뿐입니까?사람도 자꾸 기름칠을 하고 활발히 일을 해야지 안그러면 녹이 스는데….”

박우영(60)무릉역장은 올해로 철도생활 37년째다.오는 12월 정년퇴임을 앞둔 그에겐 무릉이'종착역'이다.비교적 잔 신경이 덜한 이곳에서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된 것은 장기근속자에 대한 상부의 배려 덕분이다.그러나 朴역장은 한편 쓸

쓸한 느낌을 감출 수 없다.전국 각처를 돌며 철마처럼 달려온 끝에“이제 노골적으로 쉬라”는듯한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여기가 무릉도원이지요.식구들 다 있는 고향에서 근무하고 그간 철도에만 매달리느라 세월 가는줄 몰랐으니까….”

전숙한(59)역무원이 朴역장에게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이들은 안동중학교 동기동창(6회.52년 졸업)이다.이들 뿐만 아니라 무릉역에 근무하는 10명 모두 안동출신이며 고향 선후배다.

고향은 때로 심드렁하다.그러나 오래 떠나본 이들은 알리라.고향과 식구.봄날 한때 아지랑이 속에 피어나던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히던가.개나리.진달래가 이미 야산을 물들였고 무릉역의 벚꽃도 며칠 뒤엔 만발한다.그때쯤 복사꽃이 아니더라

도 희고 붉고 노란 꽃이파리들이 땅에 떨어지고 혹 냇가를 따라 흘러도 갈 것이다.이곳의 젖줄인 미천을 따라서. 〈안동=임용진 기자〉

<사진설명>

무릉역을 빠져나온 화물열차가 미천 철교 위를 지나고 있다.절벽과 그 위

무릉랜드의'돌지 않는 풍차'허니문카는 지명과 어우러져 묘한 정취를 풍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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