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대통령이 국가 정체성을 걱정하는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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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명박 대통령이 22일 청와대 행사에서 “국가 정체성을 훼손하는 굉장히 폭넓고 뿌리깊은 상황이 있다”고 말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비상한 일이다. 대통령의 주장에 대해선 정파나 이념에 따라 여러 시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우려하는 현상들이 실제로 있으며 정체성은 경제위기와 함께 한국 사회의 당면 문제라는 데에는 상당수 동의하는 분위기다.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법치와 자유민주주의·시장경제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만 보더라도 국회에선 의회민주주의가 유린되고 있다. 대선·총선에서 이긴 정권이 각종 경제 살리기·사회개혁 법안을 추진하는데 선거에서 진 야당이 또다시 이념이란 장애물로 가로막고 있다. 야당과 일부 민간세력은 현 정권을 ‘민간독재’로 규정하고 경제·미디어 관련 법안을 재벌을 옹호하는 것이라고 매도한다. 새 정권이 들어섰는데도 좌편향 교과서를 고치는 게 힘들고, 각종 과거사위원회를 포함해 지난 정권 10년의 좌편향을 바로잡는 일은 요원하다. 쇠고기 촛불사태 때는 법치가 유린되면서 도심이 무법천지가 됐다. 이를 뭉뚱그려 대통령은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언급하지 않았나 싶다.

정체성의 동요에는 현 정부의 책임도 크다. 부실한 협상으로 쇠고기 사태의 빌미를 제공했으며 무법사태에 단호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각종 인사 파동으로 스스로 도덕성과 추진력을 훼손했다. 대통령 지지율은 대선승리 때의 반 토막이다.

국가 정체성은 정권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문제다. 그러므로 정체성 복원의 해법도 공동체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대통령은 실정(失政) 부분을 자성하고 올바른 역사관과 법과 질서를 정립하려는 의지를 다져야 한다. 민주당의 대선패배는 진보 10년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다. 민주당과 진보성향 민간세력은 선거로 뽑힌 현 정부의 정통성과 국정 주도권을 인정해야 한다. 정부·여당의 정책과 법안에 대해 의견을 펴되 종국엔 다수결이란 의회민주주의 원칙에 승복해야 한다. “MB 악법” “미디어 7대 악법” 등은 국가 정체성을 위협하는 선동적 구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