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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 수 없는 세상 목소리로 열어드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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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7일 오후 7시 서울 상계동의 시립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 해 짧은 겨울날, 사위는 벌써 어두컴컴했다. 2층 녹음실에는 침묵이 흘렀다. 이 시설의 녹음 부스 8개 가운데 한 부스 안에서 희미하게 책 읽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부스 안에서는 한국외대 교직원인 이소영(31)씨가 여소설가 한강씨의 소설집 『채식주의자』 중 한 편을 녹음하고 있었다. 이 소설은 ‘상처 입은 영혼의 고통을 소재로 섬뜩한 아름다움을 표현했다’는 평단의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 이씨를 포함한 ‘책 녹음 봉사단’ 회원들은 시각장애인들에게 위로가 될 것 같다며 이 책을 선택했다. 소설이 클라이맥스에 이르렀는지 이씨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연극배우 출신인 허걸(56·무역업)씨 등 녹음을 지켜보던 회원 세 명이 작은 소음조차 내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오디오북을 만들어 온 ‘책 녹음 봉사단’ 회원들이 17일 녹음 작업을 위해 서울 상계동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을 찾았다. 왼쪽부터 이소영·박수경·허걸·이귀옥씨. [강정현 기자]


‘미디어접근센터’라고 불리는 노원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두 차례 녹음 작업이 이뤄진다. 책을 읽지 못하는 시각장애인들이 들을 수 있는 책(오디오북)을 만들기 위해 봉사단 회원들이 책을 읽고, 이를 MP3파일·CD·카세트테이프 형태로 녹음하는 작업이다. 1983년에 시작된 사업으로 90년부터 서울시에서 비용을 대지만 녹음은 처음부터 자원봉사자에 의해 꾸려져 왔다.

현재 봉사단 회원은 80명. 대부분 직장인이기 때문에 작업은 주로 평일 저녁에 이뤄진다. 이씨는 4년째 활동 중이다. 그는 “책을 읽으면서 남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시작했지만 막상 시각장애인에게 책 내용이 정확하게 전달돼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면 억양 조절조차 쉽지 않아 진땀을 흘리곤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씨는 “내가 녹음한 오디오북이 시각장애인들에게 세상을 읽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에 커다란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힘들지만 봉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들이 녹음한 오디오북은 전화·인터넷 신청을 통해 전국의 오디오북 애청자에게 대여된다. 경남 통영에 사는 1급 시각장애인 김충실(58)씨는 80년대 중반부터 지금까지 400여 권을 귀로 읽었다. 그는 “시각장애인들은 자칫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데, 오디오북 덕분에 무료함을 달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씨처럼 봉사단이 녹음한 오디오북을 이용하는 시각장애인은 전국적으로 3000여 명이다. 지난달 시각장애인 최초로 사법시험에 합격한 최영(27)씨도 2006년 회원에 가입했다. 사법시험 준비에 바빠 그동안 책을 빌려 듣지 못하다가 최근 존 그리샴의 소설 『거리의 변호사』를 읽었다. 최씨는 “시험 스트레스도 풀고 미래 법조인으로서 마음을 다잡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봉사단은 지금까지 3000여 권을 녹음했다. 앞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장쾌한 액션에 끌리는 것일까. 시각장애인들에게 인기 있는 책들은 뜻밖에도 역사·추리·무협소설 등이다. 6권이 녹음된 무협소설 『명왕전기』(전 9권)가 가장 인기가 높다.

매일 오전 9시 일간지 기사를 녹음해 봉사단 홈페이지(www.kbumac.or.kr)에 올리는 작업도 봉사단의 주요 임무 중 하나다. 성우 지망생인 회원 세 명과 복지관 직원 두 명 등 다섯 명이 매일 꼬박 2시간30분 동안 매달린다. 예정된 시간보다 5분만 늦게 올려도 이용자들의 문의 전화가 걸려 온다.

복지관 미디어접근센터의 황덕경 팀장은 “봉사단원들이 녹음 전날엔 목소리 관리를 위해 노래방도 가지 않을 정도로 열성”이라며 “이들이 없었더라면 많은 시각장애인이 오디오북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최선욱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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