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경원 칼럼

韓·美 신뢰회복 급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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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미 안보관계가 걱정스럽다.

최근 미 국방부는 주한미군 1개여단을 이라크에 급파(dispatch)한다고 통보해 왔다. 그리고 지난 25일 찰스 캠벨 주한 미8군 사령관은 기자회견에서 주한미군은 앞으로 세계 어디에도 출동할 수 있는 신속대응군이 될 것이며 한반도 안보는 한국군이 중심역할을 담당하고 한.미연합군은 다른 지역에 투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심각한 이야기다.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런 발언을 과거 어느 때보다 한.미관계가 민감하게 된 현 시점에서 주한 미군 사령관이 했다는 데 있다. 왜 그랬을까.

*** 파병 관련 실망 느꼈을 수도

공식협의를 통해 합의점에 도달한 뒤 대외적으로 양국 정부가 함께 발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그런 방식을 택했을까.

필자는 주한미군의 이라크 파병 결정이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에 워싱턴에 있었는데 그때 만난 미국 조야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이번 결정은 이라크 사태가 추가 전투병력의 투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그러니까 한국에 어떤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은 아닌 것이 확실하다.

다만 미국은 한국 정부가 약속한 병력이 주로 전투임무를 맡은 부대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훈련된 전투병력이 필요하게 되어 주한미군의 일부를 이동시키기로 결정했다면, 한국에 대한 어느 정도의 실망감을 포함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미8군 사령관의 발언은 그 내용 면에서 보면 냉전 종식 후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자체의 기능을 지리적으로 크게 확대한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동북아와 나토지역은 다르다. 나토는 원래부터 다자간 지역 안보체제로 탄생했지만 동북아지역은 처음부터 안보의 지역화가 불가능했다.

그런데 내용보다도 더 중요한 점은 나토의 경우 회원국들의 진지하고 철저한 토의를 거쳐 나토의 기능을 확대했는데, 주한 미군 사령관의 발언은 책임있는 정부 대 정부의 협의를 제의한 것도 아니고 미국 정부의 입장을 설명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면서 한국 정부에 압력을 가하려는 것 같은 불필요한 인상만 준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미 국방부 고위층은 한국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 협의의 상대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 간에 매우 중대한 문제를 군사령관의 입을 빌려 넓은 마당에 던져 버리는 식으로 아이디어를 던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단 주한미군 일부를 이라크로 보내는 데 대해 국무부는 국방부와 의견을 달리했을 수 있다. 한국 국민의 반응에 더욱 신경써야 하는 국무부의 입장에서는 국방부의 일방적 조치에 대해 회의적이거나 적어도 열렬히 동의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미국과 한국이 서로를 신뢰하지 못 하는 데 있다. 이번에 보여준 한.미 간의 움직임을 보면, 미국은 한국을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에 주한미군의 역할과 같이 중요한 문제를 넓은 길거리에서 고함지르면서 처리하자는 자세로 나왔고 한국 정부는 동맹국 간 조성된 불신관계의 현실을 직면하기를 거부하면서 문제를 방치해 두는 안이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 기존 동맹 잃는 건 어리석어

지금 한.미관계는 참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미 국방부는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유일 초강대국이 되어버린 미국에 도전할 수 있는 나라는 중국뿐이라고 보고 중국을 견제 및 포용하는 복합적 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전략적 틀 속에서 한국은 어디로 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는 것이다. 한국은 결국 중국 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의 동맹을 계속 유지할 것인가? 아니면 한국의 제3의 전략은 무엇인가.

앞으로 우리가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는 참으로 산적해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당면한 전략적 선택을 하는 데 있어 기존의 동맹국과 신뢰부터 상실해 버리는 우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얻기도 전에 가지고 있는 것부터 먼저 버리는 것은 진보와 보수의 문제가 아니라 우둔함과 현명함의 문제다.

김경원 고려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