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靑田 이상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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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의 개인사엔 두건의 특이한 사건이 있다.하나는 일제(日帝)가 주관했던 조선미술전(鮮展)에서 그가 8회 연속 특선이라는 유례없는 기록을 세웠다는 점이다.또 하나는 36년 손기정(孫基禎)선수가 베를린 올림픽

에서 우승했을 때 孫선수 사진에서 유니폼의 일장기를 지워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두 경력이 기묘하게 얽혀 청전의 생애에 깊은 굴곡을 긋게 된다.일제때엔 선전 8회 특선기록에도 불구하고 그를 선전 심사위원으로 뽑아주질 않았다.일장기를 말소한 못된 조선인(不逞鮮人)으로 낙인찍힌 탓이다.38년에야 심사위원이 된다.

해방이 되자 이번엔 그의 반일(反日)과 다채로운 경력이 오히려 화근이 돼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와 청전은 국전 심사위원에서 탈락한다.일장기말소사건의 경력은 사라지고 선전 심사위원이었다는게 친일(親日)로 둔갑해버린 것이다.역사

의 아이러니일까,부박(浮薄)한 인심 탓일까.

청전화법의 특이성은 일반인들의 동양화개념을 확 바꾸는데 있었다.중국식 관념 산수가 아니다.머리 속으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겸재(謙齋) 정선(鄭)처럼 실경(實景)산수다.본대로 그리고 자신의 느낌을 담는다.

청전이 겸재와 다른 점은 그는 결코 화려한 자연을 소재로 삼지 않는다.비산비야(非山非野)의 농촌이 그의 화재다.38년작'모운'(暮韻)이나 60년대작'설촌'(雪村)까지 그는 줄기차게 적막한 산촌과 외딴 초가집,그리고 가난한 농부와

소 등 우리 농촌의 흔한 삶을 소재로 삼았다.

툭툭 점을 찍어가는 그의 화법 또한 특이하다.미점(米點)이라 한다.서양화가 박서보(朴栖甫)가 청전 사후 묘법(描法)을 개발했다.미점방식의 동양화가 서양화에 미친 상승효과라 할 수 있다.

그는 가을을 즐겨 그렸다.여름의 풍성함을,봄날의 화창함과 겨울의 적막함을 그리기도 했지만 그중에도 특히 가을의 스산한 야취(野趣)가 단연 돋보인다.그가 살아온 어두운 사회상의 반영일지도 모른다.그의 말년작 대부분이 추수기의 풍요보다는 덧없고 허무한 쓸쓸함을 담은 가을 풍경이 우리 가슴을 아리게 한다.

청전 탄생 1백년이다.그를 기리는 전시회가 지금 호암갤러리에서 성황리에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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