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의오늘>中. 황금바다서 뛰는 사람들(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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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SS테크놀로지의 후버 첸 부사장은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를 닮고 싶어하는 40대 초반의 대만 출신 공학박사다.

95년 10월 공개될 때 1억2천만달러의 자금이 몰려 반도체업계의 최고 기록을 세웠던 ESS는 요즘 멀티미디어 분야에 주력하고 있고,벨 연구소등에서 일하던 그는 96년 ESS에 합류했다.

첸 부사장은 그러나 이 점만은 그로브를 닮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닮아가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고 말한다.바로 '미래에 대한 공포'다.

“제품 디자인이 끝나기도 전에 주문이 달라진다.제품 주기가 이젠 9개월도 채 안된다.그로브도 악몽을 꿀 정도라니,정말이지 이곳 실리콘밸리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공포를 떨칠 수가 없다.”

스피드가 생명이고 변화가 생존전략이라는 것은 실리콘밸리의 첫번째 룰이다.마이크로웨스트의 꿈을 바라보고 모여든 프로들에게 주어진'환경'이다.

컴퓨터 프로그램 언어'자바'로 유명한 선 마이크로시스템스도 그런'악몽'에 시달리며 올해로 창업 15주년을 맞았다.

창업자인 회장 스콧 맥닐리는 최근 실리콘밸리의 유력지 머큐리 뉴스와의 인터뷰에서'악몽'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기업이 커지면서 자연히 생기는 관료주의가 가장 위협적인 요소다.어느날 신규사업 결정을 내리는데 16명이 서명을 해야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깜짝 놀랐다.그 즉시로 모든 의사결정은 단 두 사람만의 서명으로 끝나도록 하는 것을 예외없는 철칙으로 정했다.”

실리콘밸리의 생명력은 끊임없는 혁신에서 나온다.벤처기업을 일궈 백만장자의 꿈을 이루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존의 위협이 시작되는 곳이 실리콘밸리다.무상한 기업 인수.합병(M&A),실리콘밸리 주변 대학들과의 긴밀한 산학(産學)협동등도

모두 '생존의 위협'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네트워크다.

다음과 같은 한 사례는 실리콘밸리의 기업들이 어떻게 경쟁력을 지켜나가는지 잘 말해준다.

멀티미디어 전문업체 A테크는 1년 6개월 전 공개돼 현재 시장가치가 13억달러에 이르는,성공한 실리콘밸리 기업이다.그러나 이 회사는 기업 공개 첫해부터 이미 외부 전문가와 함께 2년,3년뒤의 회사 모습을 새로 디자인해 왔다.3차원 그래픽 테크놀로지를 새로 확보,기업의 시장가치를 30억달러로 늘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공격적인 생존전략이 골자다.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뛰도록'꽁무니'에 불을 놓는 힘은'주가'다.

스톡옵션을 통해 백만장자의 꿈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도 주식시장이고,새 테크놀로지에 뒤처지거나 다른 경쟁자에 눌리는 기업을 가차없이 추려내는 것도 주식시장이다.부(富)의 서열은 주가에 따라 날마다 바뀐다.

잘 발달된 주식시장은 실리콘밸리의 가장 중요한'기반 시설'중 하나고,이런 면에서 뉴욕 월가와 실리콘밸리는 공존 관계에 있다.

실리콘밸리의 산학협동도 대학과 기업의 공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전략이다.

이처럼 실리콘밸리의 경쟁력은 벤처 기업들의 창업 신화만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샌호제이=김수길 특파원]

<사진설명>

조용하기 그지없는 실리콘밸리는 겉모습과 달리 생존을 위해 끊임없는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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