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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에 지쳐 우는 사람도 없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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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10년 넘게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다 결국 여기에 왔어요. 남편이 병으로 쓰러진 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 왔는데…. 하나밖에 없는 대학생 딸도 저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지요."(金모씨.50세.여)

"채권자들이 제 앞에서 엄마를 욕보일 땐 견디기 힘들었어요. 파산과 면책은 저희 모녀의 유일한 희망입니다."(金씨의 딸.20세)

지난 25일 오후 3시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2호 법정 앞. 매주 월.화.목요일마다 개인파산 및 면책 심리가 열리는 곳이다. 최근 경기침체로 개인파산 신청자가 급증하면서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늘 붐빈다.

일용직이던 金씨의 남편은 2000년 폐결핵을 얻게 되자 어려웠던 집안살림은 더욱 빠듯해졌다. 남편을 대신해 金씨가 식당일에 나서 벌어오는 월 70만원으로는 그동안 진 수천만원 빚의 이자도 갚기에 버거웠다. 채권자들에게 시달리는 것을 보다 못해 딸은 학자금 명목으로 카드 대출을 받았으나 원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

올 초 대학교를 휴학한 金씨의 딸은 "카드회사 추심원들의 집요한 전화로 아버지 병세가 악화되는 모습에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파산 신청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날 법정 앞에는 金씨 모녀 외에도 아이를 업고 온 젊은 엄마, 넥타이를 맨 신사, 청바지에 가방을 둘러멘 20대 남자, 부부나 형제.자매 등 40여명이 북적거렸다.

동갑내기 부인과 함께 온 朴모(33)씨. 외환위기 때 운영하던 세탁소가 망하고 빚 보증까지 잘못돼 5년 만에 1억여원의 빚을 져 파산신청을 냈다. 朴씨는 "대통령은 '위기를 과장하지 말라'고 했다던데, 내 주변에는 어려운 사람들뿐"이라고 불만을 쏟아냈다.

채무자가 있으면 채권자가 뒤따르게 마련. "10년 전에 빌려준 1억원을 아직도 못 받았다"는 李모(58.여)씨는 채무자가 파산 결정을 받으면 빚을 되돌려받지 못할까봐 법정 앞을 서성거렸다.

법정이 열리자 법원 직원이 나와 '예비 파산.면책자'의 이름을 차례로 부르기 시작했다. "판사님이 날짜를 재지정해 주시면 다시 나오시고, 그냥 '돌아가세요'라고 하면 집에서 기다리면 됩니다."

'날짜 재지정'은 판사가 아직 물어볼 게 더 있다는 뜻으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돌아가세요'는 심리가 모두 끝나 결정만 남겨놓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두시간 동안 모두 27건의 파산 심리와 33건의 면책 심리가 이루어졌다. 건당 2분이 걸린 셈이다. 결과는 현장에서 알 수 없고, 법원이 우편으로 통보한다.

"혹시 판사 앞에서 우는 사람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법원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울다 지친 사람들이 담담한 마음으로 찾아오는 곳"이라고 한다.

"경제적인 의미에서 파산 선고문은 '사망진단서'고, 빚을 취소시켜주는 면책 결정문은 '출생 신고서'지요." 이날 면책 심리를 받으러 나왔던 李모(44)씨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러나 면책이 끝은 아니다. 파산 전문 김관기 변호사는 "면책 결정을 받은 사람 대부분은 집 안에 가재도구 하나 남아 있지 않다"면서 "맨손으로 다시 일어서겠다는 굳은 의지가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김현경 기자<goodjob@joongang.co.kr>
사진=장문기 기자 <chang6@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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