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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마음속의문화유산>감은사터.옥룡사터 그리고 건원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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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풍수(風水)도 문화유산인가.사람들은 풍수하면'명당찾기'를 떠올리겠지만 그것은 단지'타락한'풍수일 뿐이다.풍수에서 땅은 연극의 무대와 유사하다.무대보다 배우나 연출이 연극 수준을 가늠케하듯 풍수에서도 땅 자체보다 땅을 해석.이용하는

사람들이 더욱 중요하다.

일단 문화는 인공(人工)이고 풍수는 자연을 대상으로 삼는다.그러나 대상을 정하는 주체가 사람이기에 풍수도'문화의 눈'으로 이해해야 한다.따라서 풍수유적 또한 문화유산일 수밖에 없다.인간.자연을 바라보는 우리 특유의 시각이,즉 선인

들의 슬기와 지혜가 풍수에도 고스란히 담겨있다.

나는 신라 중기의 감은사(感恩寺)터,신라말 도선국사(道詵國師)의 옥룡사(玉龍寺)터,그리고 조선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의 세가지를 통해 문화유산으로서의 풍수를 조명하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리 고유의 풍수는 아쉽게도 후대로 내려갈수록 변질됐다.자연과 인간 전체를 먼저 생각하는 미덕(美德)이 점차 힘을 잃고 개인의 영달(榮達)을 도모하는'변칙'이 득세했다.지금도 '사이비'풍수가 판을 치고 있다.이런

면에서 문화유산의 해를 맞아 풍수의 발자취를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간과한 풍수의 참뜻을 되살리는 일에 다름아니다.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우리에게는 고유의 자생풍수가 있었다.'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관련증거를 많이 찾을 수 있다.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주시양북면용당리에 있는 감은사 터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은 부처님 힘으로 왜구의 침입을 막으려 절을 세우고자 했다.그러다 세상을 떠나자 아들 신문왕이 즉위 2년(682년)에 완성했다.지금은 탑 2기외에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다.문무왕은 죽어 나라를 지키고자 근처 바

다 암초위에 수중릉을 조성했다.아들은 부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절 이름을 감은사로 지었다.

이곳의 사찰 입지는 우리 자생풍수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준다.문무대왕릉이 있는 경주시양북면봉길리에는 대금천(大錦川)이라는 비교적 큰 하천이 동해로 흘러든다.대금천을 따라 북서진하다가 추령을 넘어 서쪽으로 가면 바로 신라의 중핵지인

경주에 닿게된다.경주로 가는 최단거리다.왜구들은 도적떼이므로 기습을 선호했을 것이다.

문무왕릉이 있는 대금천 하구에서 육지를 바라보면 마치 용이 바다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보인다.그 입을 통해 왜구들이 들락거렸다.만약 용이 입을 다문다면 왜구들을 씹어버리는 결과가 된다.이때 대금천 양안(兩岸)의 용당리

.봉길리 일대 산들이 용의 이빨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감은사 3층석탑 2기는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용의 이빨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기 위한 어금니 또는 송곳니에 해당한다.이것이 바로 우리식 풍수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신라인의 풍수 비보책(裨補策.허한 곳을 채워줌)인 것이다.

이런 해석을 내려보면 문무왕이 용이 되려 한 사연,부근에 용자(龍字)돌림 지명이 많은 연유,감은사에 바다와 통하는 특수구조가 장치된 까닭,그리고 3층석탑 2기의 입지 배경등이 확연하게 밝혀진다.

중국의 이론풍수는 신라말에 들어온다.이때 도선국사가 자생풍수와 중국풍수를 혼융해 우리식 지리학을 만들어냈다.이에 그의 자취를 찾는 것은 우리 지리학의 연원을 찾는 길이다.

현재 전남광양시옥룡면추산리 외산마을에 옥룡사라는 암자가 있다.근래에 지어진 것이나 순천대박물관 조사팀은 본래의 절터도 이 부근 일대로 추정했다.도선은 여기서 35년 동안 머물렀다.도호(道號)옥룡자(玉龍子)도 여기서 이름을 땄다.

절로 올라가는 길가 풍경은 우리 농촌의 전형이다.위로는 둥그스름한 산들이 올망졸망 어깨를 겯고 있고 아래론 고만고만한 논밭이 골골마다 평평하게 자리잡았다.'황제내경'에 나오는“하늘이 둥그니 인간의 머리가 둥글고 땅이 평평하니 인간

의 발이 평평하다”는 말처럼 어찌 그리도 땅 모습이 사람을 닮았는지.아니 사람이 땅을 닮은 것인지.

도선국사와 관련된 절터는 하나같이 평범하다는 특징이 있다.영암 도갑사가 그렇고 화순 운주사도 그러하며 곡성 태안사 역시 마찬가지다.중국풍수의 영향을 받은 신라말 이후의 큰 가람처럼 웅장하면서 주위를 압도하는 거대한 산자락에 터를

잡는 식이 아니다.그저 큰집 가는 길처럼,고향 가는 길처럼 둔덕 같은 산들과 여기저기 박혀 있는 들판을 따라 걷다보면 수줍은듯 둘러앉은 절들이 바로 도선의 절들이다.

도선풍수에서 가장 위대한 특징도 그가 잡은 터들이 한결같이 소위 명당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옥룡사는 습지라 숯을 덮은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었고 도갑사 역시 그랬다.

결함 있는 땅에 대한 사랑이 도선풍수의 목표였다.그것이 바로 비보(裨補)풍수다.도선은 땅을 어머니와 일치시킨다.그 어머니의 품안이 우리의 삶터가 된다.

어떤 어머니도 어느 정도의 문제는 있는 법이다.피곤할 수도,병에 걸릴 수도,화가 날 수도 있다.우리는 그런 어머니의 품안을 생각해야 한다.도선은 바로 그런 완벽하지 못한 어머니,우리 국토를 사랑하자는 땅에 관한 지혜를 알려준다.

여러 절을 답사하며 절실히 깨달은 것도 도선은 정말 어머니인 국토를 사랑했다는 점이다.바로 곁에 좋은 땅을 두고도 도선은 그 터를 차지하지 않았다.도안(道眼)이 없어서가 아니다.국토의 온갖 병통(病痛)을 풍수로 고치려 했기 때문이

다.오죽하면 그와 연기(緣起)된 사찰들이 거의 다 폐찰(廢刹)이 됐겠는가.

오늘의 이기적 풍수는 엄밀히 따지면 풍수가 아니다.돌아가신 부모님 백골에서까지 무엇인가 얻어내겠다는 마음이 어찌 사랑이겠는가.그것은 실학자들 표현대로 나라와 겨레를 망칠 지점술(地占術)에 지나지 않는다.도선풍수의 본질은 땅과 사람

에 대한 사랑이며 그 방법론도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고침(治療)의 추구다.

그런데 조선초 자생풍수의 국토사랑이 희박해지면서 이기적 음택(陰宅)풍수의 발복잡술(發福雜術)로 돌아간다.

동구릉(東九陵)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이 대표적이다.좌우의 용호(龍虎)는 갖춰졌으나 형세가 완벽하다고 볼 수 없다.그러나 지기(地氣)는 장중하여 지금도 위엄에 손색이 없다.조안(朝案:능의 전방)은 해와 달이 명당을 감싸안은

형국(日月相抱形)으로 당대 최고수들이 국토 최대의 길지로 잡은 터다.

하지만 무엇하랴.그의 자식들은 서로를 죽였으며 자신도 아들에 의해 유폐되지 않았던가.

중국 술법풍수가 사랑을 기반으로 하는 자생풍수를 궤멸시키고 조선풍수의 자리를 차지한뒤 남은 것이라고는 그런 욕심과 이기와 오염밖에 없는 셈이다.이런 점에서 건원릉은 후세인들에게 교사의 구실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사진설명>

광양 옥룡사

원래 명당이 아닌 습지 위에 숯을 덮은 후에야 절을 지을 수 있었다.신라고승 도선국사의 '결함있는 땅'을 되살리고 보살피려는 남다른 사랑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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