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한국은행법 1조, 이번 정기국회서 개정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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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호 02면

사람이든 조직이든 혹독한 위기를 맞아봐야 됨됨이가 속속들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엉거주춤, 꾸물꾸물 요즘 한국은행의 행보가 딱 그렇다. 금리인하와 유동성 공급, 금융회사 지원 등 뭐 하나 시원스럽게 한 게 없다. 금융위기 이후 팔을 걷어붙이고 뛰는 해외 주요국 중앙은행들과 견줘 보면 더 그렇다.

그런데 한국은행은 “법대로 할 뿐이다. 법이 우리의 역할을 그렇게 규정하고 있다”고 항변한다. 무슨 얘기인가. 한국은행의 존립 근거인 한국은행법 제1조를 두고 하는 말이다. 1조의 내용은 이렇다. ‘한국은행은 효율적인 통화신용정책 수립과 집행을 통하여 물가안정을 도모함으로써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한마디로 물가안정을 위해 존립하고 있는 만큼 경제성장과 금융시스템 안정 같은 다른 정책 목표를 한국은행에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게 한은맨들의 주장이다. 이성태 한은 총재가 지금 시기에 생뚱맞은 인플레이션 걱정을 하고 있는 것도 한은법이 걸어 놓은 물가안정 주술 때문이다.

답답한 노릇이다. 불을 끄던 소방차가 인근 관청에 물 공급을 요청하자, 물은 많지만 음수용으로 비축해 놓은 것이라 소방용으론 내줄 수 없다고 버티는 꼴이다.

그렇게 법을 지키며 우직하게 살겠다는 데야 어쩌겠는가. 법을 고치는 수밖에 없다. 이번 기회에 한국은행법 1조를 뜯어고쳐 한은의 역할을 정상화해야 한다. 법을 앞세워 세상에 오불관언하는 듯한 한은의 태도를 이제 현실의 거센 풍랑으로 끌어내 뛰도록 해야 한다.

법 개정의 포인트는 간단하다. 미국이나 일본처럼 ‘경제발전(=고용촉진)’과 ‘금융시장 안정’을 설립 목적에 추가하는 것이다. 1997년 외환위기 전까진 한은법 1조에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와 그 기능 향상에 의한 경제발전과 국가자원의 유효한 이용의 도모’라는 조항이 존재하고 있었지만 법을 개정하며 빼버렸던 것이다.

한은 산하에 있던 은행감독원을 통합 금융감독원으로 분리해 내보내면서, 한은의 역할을 인플레이션 타기팅(물가안정 목표제)으로 한정하기 위한 법 개정이었다. 한은으로선 반발할 법도 했지만 중앙은행 고유의 독립성을 강화할 기회라는 명분으로 선뜻 받아들였다. 이때부터 한은은 물가안정에 안주했다. 정부의 다른 정책 협조 요구에는 독립성 훼손을 이유로 반발하곤 했다.

인플레이션 타기팅은 90년 뉴질랜드 중앙은행이 처음 도입한 것으로 현재 채택 중인 나라는 영국·스페인·핀란드 등 8개국에 불과하다. 경제성장에 연연하지 않는 고령화 복지국가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아직 성장이 절실한 나라다.

한은법 개정의 필요성은 이제 분명해졌다. 한은도 물가안정의 굴레에서 벗어나 경제위기 상황에 적극 대응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줘야 한다. 당장 행동에 옮겨야 한다. 여야는 이번 정기국회 회기 안에 한은법을 개정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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