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노을 시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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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천양희(1942~ ) '노을 시편' 전문

강 끝에 서서 서쪽으로 드는
노을을 봅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오래되어도 썩지 않는 것은 하늘입니다
하늘이 붉어질 때 두고 간 시들이
생각났습니다 피로 써라
그러면…생각은
새떼처럼 떠오르고
나는 아무 것도
쓸 수 없어
마른풀 몇 개를 분질렀습니다
피가 곧 정신이니…
노을이 피로 쓴 시 같아
노을 두어 편 빌려 머리에서 가슴까지
길게 썼습니다 길다고 다 길이겠습니까
그때 하늘이 더 붉어졌습니다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내 속으로 노을 뒤편이
드나들었습니다
쓰기 위해 써버린 많은 글자들 이름들
붉게 물듭니다
노을을 보는 건 참 오래된 일입니다



시인들은 단 한 편의 시, 어쩌면 영영 쓸 수 없는 절명(絶命)의 시를 위해 수많은 시로 연명(延命)해 간다. 어떤 이는 뼛속까지 내려가 쓰라 하고, 어떤 이는 내면의 밀물과 썰물에 몸을 맡기라 한다. 여기에서는 피로 쓰라고,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하라고 말한다. 쓰기 위해 쓰는 시가 아니라 노을처럼 온몸을 쪼개 쓰는 시를.

나희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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