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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가 기억을 거부하는 순간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호 34면

해마다 연말이 다가오면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음에 대해 못내 아쉬워진다. 왜 이 시기만 되면 지난 한 해 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만 떠오르는지.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해마다 연말이면 올해는 지난해보다 더욱 빨리 지나갔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분명 시간의 길이는 일정할 텐데 왜 내가 체감하는 시간은 점점 더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질까?

이에 대해 ‘나이 들수록 시간은 왜 빨리 흐르는가’라는 주제로 책을 쓴 다우메 드라이스마는 나이 들어갈수록 시간이 빠르게 흘러가는 이유를 인간의 ‘기억’에서 찾는다. 1분 1초는 시계로 측정하지만, 우리의 인생은 ‘개인의 기억’이라는 주관적 잣대로 측정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컴퓨터처럼 모든 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는 컴퓨터와 달리 인간의 뇌는 정보가 입력되었다고 해서 이를 바로 저장하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뇌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을 관장하는 부위가 각각 따로 존재하며, 수없이 많이 입력되는 정보 중에서 선별되어 장기기억으로 오래도록 남는 기억은 일부뿐이다. 이런 이유로 학자 중에는 우리가 반드시 잠을 자야 하는 이유로 ‘기억의 선별’을 꼽기도 한다.

잠을 통해 우리는 낮에 무작위적으로 뇌에 입력되었던 정보를 선별하고, 기억할 것과 망각할 것을 구분한다는 것이다. 이때 꿈이란 잠을 자는 동안 뇌에서 이루어지는 정보의 분류 과정에서 슬쩍슬쩍 보여지는 기억의 편린들이다. 실제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면 기억력이 현저히 저하되며, 극단적으로 잠을 억제하는 경우에는 날짜와 장소의 구분마저 희미해지기 때문에 이는 매우 타당성이 높은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이처럼 뇌에서 일어나는 정보의 선별적 저장 능력은 시간을 저마다 다른 길이로 느끼게 만든다. 80대 노인들을 대상으로 기억에 대한 연구를 한 결과 노인들은 인생의 8분의 1에 불과한 15~25세의 일에 대해 인생에서 3분의 1을 넘게 차지하는 최근 30년간의 일들보다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노인이 될수록 자신의 일생을 소설처럼 회고하는 버릇이 있다. 소설은 이야기를 가지고, 이야기는 사건들의 연속으로 이루어지기에 소설처럼 떠올리는 일생에 대한 회상은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일들보다 절대적 시간의 길이는 짧아도 재미있거나 강렬했던 일들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강렬한’ 느낌으로 남는 기억은 대개 ‘처음’과 관련이 있는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던 첫사랑, 처음으로 대학에 떨어지고 좌절을 맛본 날, 오랜 진통을 견디고 만난 아기와의 첫 대면은 뇌리에 깊이 박혀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생생하다.

이처럼 처음 경험한 일들은 그 강렬함으로 인해 선명하게 저장되곤 하는데, 인생에서 이런 ‘첫 사건’들은 주로 소년기와 청년기에 몰려 일어나기 때문에 인생이라는 한 편의 소설에서 이 부분이 차지하는 페이지는 상대적으로 많아지고, 인생을 되돌아봄에 있어 그 시기는 더 길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했던 첫 경험은 지루한 일상이 되고, 강렬했던 첫 키스의 추억도 한 줌의 바람에 날려가게 되면, 즉 일탈이 일상이 되고 나면 우리의 뇌는 이에 더 이상 ‘기억할 만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나이 들수록 하루하루가 단조롭기 그지없지만 정작 세월은 속절없이 빠르게 흐른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그의 뇌가 기억할 만한 가치를 가지는 일이 그만큼 적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해마다 제야의 종소리를 다시 듣는 시간이 점차 짧아지고 있다고 느낀다면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지난 1년간 스스로 자신의 뇌에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들을 제시해 주지 않았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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