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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미시 세계사] 테러리스트의 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90호 35면

오스트리아 빈의 군사박물관에는 19074라는 일련번호가 적힌 38구경 브라우닝 1910 권총이 있다. 역사를 바꾼 ‘테러’의 증거물이다.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제위 계승 예정자였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부인의 목숨을 앗아간 바로 그 무기다. 이른바 사라예보 사건 말이다.

총을 쏜 인물은 가브릴로 프린체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청년이다. 재판에서 자신을 유고슬라비아 민족주의자라고 강조했다. 발칸반도 남부에 사는 세르비아계와 크로아티아계, 보스니아 무슬림(중세 때 이슬람교도로 개종한 세르비아계의 후손)이 힘을 모아 유고슬라비아(남슬라브족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세르비아계의 주도권을 요구하는 그룹)는 아니었다. 7명의 암살 실행조에는 무슬림도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이 암살 테러는 제1차 세계대전을 불렀다. 수천만 명의 목숨이 대가로 지급됐다. 종전 뒤 그의 꿈대로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들어섰다. 그는 전쟁을 촉발한 원흉과 유고슬라비아 건국을 이끈 영웅이라는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사형선고가 가능한 20세에서 27일이 모자라 대신 20년 징역형을 받았던 그는 1918년 4월 28일 보헤미아의 요새 감옥에서 폐결핵으로 숨졌다.

프린체프에게 갔을 비난과 칭송을 대신 받은 것이 그가 살던 사라예보의 집이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파괴됐던 이 집은 전쟁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들어서면서 기념관으로 복구됐다. 하지만 사라예보가 1941년 나치 독일에 점령되고 괴뢰국가인 크로아티아의 일부가 되면서 다시 부서졌다. 3년 뒤 공산 유고슬라비아를 건국한 티토가 이를 재건했으며, 사라예보시는 기념관을 하나 더 지어 영전에 바쳤다. 1990년대 초 유고슬라비아가 갈기갈기 찢어지고 내전이 터지면서 이 집은 또다시 무너졌다. 이번에는 사라예보 시당국에 의해서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세르비아계와 무슬림, 그리고 크로아티아계가 서로 살육하는 지옥이 되면서 이 도시는 세르비아계에 포위됐다. 세르비아 저격병의 총탄으로 시민이 줄줄이 쓰러지면서 프린체프는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상징으로 치부돼 비난받았다.

더욱 기가 막힌 점은 사라예보시가 세웠던 또 다른 기념관이 그가 암살한 페르디난트 대공과 합스부르크 왕가 기념관으로 변한 것이다. 암살 현장에는 나무 기념비만 달랑 남았다. 보스니아어와 세르비아어(이 두 언어는 통역 없이 서로 통한다. 하지만 내전으로 등을 돌린 뒤부터 서로 다른 언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영어로 ‘평화가 온누리에 퍼지기를’이라고 새겨져 있다.

테러로 한때 뜻을 이뤘던 프린체프. 이젠 고향에서조차 버림받고 있다. 총성이 머물던 그 자리는 평화를 바라는 기도로 채워지고 있다. 이번 주 무차별 학살극으로 인도 뭄바이를 피바다로 만든 테러리스트들. 그들이 머물 집도 이 세상에 결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젠 참극을 보복이 아닌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계기로 삼을 정도로 인류도 성숙해져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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