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논조>옐친,국정수행 못하면 물러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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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분명 심각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지난해말 심장수술을 받은후 잠깐 모습을 드러냈던 그는 최근폐렴으로 다시 병상에 누웠다. 옐친은 지난 6일 이후 모든 공식석상에서 자취를 감췄다.러시아가 민주헌법의 전통과 법에 의한 통치,권력기구들간의 적절한 균형등을 갖춘 나라라면 이것은 문제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옐친 스스로 고안한 러시아 헌법은 대통령인 그에게 막강한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다. 그는 부통령을 두지 않고 있으며 대통령령만으로도 얼마든지 국정을 요리할 수 있다.이 뿐이 아니다.그는 마음만 먹으면 국회와 내각을 즉각 해산할 수도 있다. 이미 러시아는 표류하고 있다. 정부의 통치력은 마비 조짐을 보이고 있고,국민들은 병든 대통령 주변에 포진한 신흥 자본가들의 권력 남용과 부패에 절망하고있다. 옐친이 집무실에 나타나지 않으면서 주요 국정 현안의 결정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유럽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의 협상이다.이 협상을 마무리지을 사람은 옐친 뿐이다. 또 대통령 선거를 마친 체첸은 조만간 독립을 선포할 태세다.경제문제에 있어서도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고 있으며,통신분야등의 긴급한 개혁도 답보상태다.러시아는 지금 대통령을 필요로 하고 있다. 옐친 측근들은 현재 그들이 쥐고 있는 권력을 일시에 잃게 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특히 대통령 사임시 3개월 안에치러야 하는 새 선거와 그에 따른 알렉산드르 레베드의 집권 가능성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같은 변화 앞에서 살아남기 힘들 것이란 사실을 잘 아는 옐친 측근들은 가능한 한 옐친의 권력이 오래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현재 모스크바에선 옐친 측근들이 헌법을 개정해 옐친이 권좌에서 물러나더라도 대통령 선거를 늦추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루머가 나돌고 있다. 일부 서방국가들도 레베드나 공산주의자들의 집권을 두려워한 나머지 이같은 계획에 동조하고 있는 것같다.그들은 옐친 이후의 안정적 권력이동을 희망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을 냉정히 보면 권력이동은 이미 시작됐다. 진짜 위험한 일은 병든 대통령 아래에서 권력이 장기간 표류하면 긍정적 개혁작업마저 불신받게 될 것이란 사실이다. 이 경우 이제 막 싹튼 러시아의 시장경제와 안정적 국제협력 관계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옐친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온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다.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보인다. 과거 옛 소련에서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병상에서 수년동안 권력을 유지했던 것과 같은 일이 반복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브레즈네프 시대의 타락한 권력은 결과적으로 소련의 붕괴를 결정지었다. 옐친은 다시 권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면 스스로 물러나는 용기를 보여야 할 것이다. [정리=김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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