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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스타일리스트>삐삐밴드 새보컬 권병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고구마에 관한 몇가지 사실-. 조선조 후기때 일본에서 들여온 구황(救荒)작물. 희석식 주류인 소주의 주정을 빼는 공업원료. 추운 겨울날 아파트 입구에서 발길을 잡아끄는 향수 상품. 전라남도 함평에서 농민들의 폭동을 야기했던 사건의 주인공….

어떤 걸 갖다 붙여도 고구마가 주는 이미지는 한쪽 방향으로 몰린다. 어감이 주는 느낌 그대로 가난·촌스러움·다정함을 연상시킨다. 편리함의 상징인 24시간 편의점의 진열장이나 대형 양판점에 군고구마는 없다.

권병준. 74년생으로 올해 대학을 졸업한다. 서울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지만 일찍이 음악에 미쳐 중·고교때부터 밴드를 만들어 부모 속 참 많이 썩였다. 1m80㎝의 키에 귀여운 악동같은 외모가 눈길을 잡아끈다. 피부색만 다르지 미국 흑인 팝가수 프린스를 빼닮았다. 그러나 생각하고 행동하는게 더 재미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공란이던 그의 신상명세서 직업란에는 ‘가수’라는 글자가 들어선다. 첫 직장은 95년 결성돼 독특한 캐릭터로 단박에 가요계의 샛별로 떠오른 3인조 펑크록 그룹 ‘삐삐밴드’다. 그는 지난해 가을 이윤정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며 공석이 된 그룹의 보컬자리를 새로 맡았다. 기존의 어느 그룹보다 도발적인 음악세계를 펼쳐보이는 밴드의 보컬리스트. 그의 예명이 ‘고구마’다.

왜 하필이면…. 요즘 유행하는 ‘자연회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거냐고 물어봤다. 그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질색이다. 그냥 아무 뜻도 없는 것 같아서”라고 답한다. 삐삐밴드는 팀원들의 개성과 철학이 강해 호흡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 점에 이끌렸느냐는 물음에도 그는 “원래 형들(강기영·박현준)의 음악을 좋아했고 같이 얘기해 보니 생각하는게 비슷한 점이 많았다”고 답할 뿐이다. ‘사회의 위선을 거침없이 풍자하는게 마음에 들었어요’라든지 ‘음악을 통해 행동하는 점이 좋았어요’라는 투의 말을 그는 쓰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약간은 귀찮아하면서 모든 답변을 행동을 결정하게 된 마지막 단계의 개인적 기호 차원에서 말했다. 지난해 9월부터 광나루의 선착장 바지선에서 칩거하며 만든 ‘바보버스’의 가사는 그의 어법과 닮아있다.

“잘난 척 하지마. 똑바로 살아봐. 첨으로 돌아가. 뽀사시(뽀얗다는 뜻의 사투리)아가씨. 구정물 아저씨. 화가 날 것 같애요. 오어 오어어 무슨 얘길 해야 할지. 오어 오어어 아무말도 할게 없는데. ”

“세상이 온통 바보 같아서 써봤다”는 이 노래는 이야기와 논리는 없고 파편적인 외침만이 있다. 답답한 세상에 대해 무언가 말은 해야 하는데 할말은 찾지 못하고 있다. 015B가 “저녁이 되면 습관적으로 전화를 하고…”라며 사랑도 비즈니스처럼 돼가는 세태를 꼬집었던 것과는 다르다. ‘아주 오래된 연인들’이 ‘사랑은 뭔가 열정적인 것’이라는 관습의 거울에 세태를 비춘데 반해 ‘바보버스’는 깨진 거울에 투영된 만화경의 조각을 그대로 옮겨 놓을 뿐이다.

<글=남재일 ·사진=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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