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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과학 홀대하다 기술속국 전락한다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9호 34면

미국발 금융위기로 전 세계가 경제위기를 맞고 있다.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제조업 시대 이후의 서비스산업 시대를 제3의 물결이라고 했는데, 이번에 그 대표 격인 금융산업이 무너졌다. 1990년대부터 수학과 컴퓨터를 이용하고, 물리학적 문제해결 방식에 기반을 둔 금융공학이란 새 분야가 개척됐다. 과학적·정량적인 기법으로 만든 첨단 서비스 기술이 꿈틀거리는 욕망과 만났을 때 불건전한 금융상품을 만들었다. 이런 첨단 파생상품의 위험과 가치를 적절히 평가해야 하는 복잡계(complex system) 문제를 다뤄본 경험이 없는 정부들은 리스크 관리에 실패했다. 돈이 돈을 벌던 금융산업에 ‘건전성’이라는 기둥이 없으면 금방 무너진다는 사실을 비싼 대가를 치르면서 배우고 있다. 물건을 팔거나 서비스로 돈을 벌던 시대와 똑같이 건전성과 같은 사회의 기본은 어느 시대에나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기본의 중요성은 금융에서뿐만 아니다. 사회 모든 면에서 그러하듯 과학기술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이 충실한 과학기술은 자신을 지탱하고 발전시킬 수 있지만, 근본이 허약한 과학기술은 버티지 못한다.

일본은 1935년 발표된 논문으로 4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30년대에 이미 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해방 당시 물리학 전공 대졸자 수가 10명 남짓이었으니 과학 수준이 얼마나 뒤졌는지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뒤늦게 제2의 물결 속에 뛰어들어 현명하고 과감한 선택과 집중으로 눈부신 발전을 하였다. 우리 전통사회의 도덕과 건전성은 경제발전의 기둥으로서 이를 지탱해주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앞만 보고 뛰느라 기초체력을 챙길 수 없었다. 빌려오고 베껴온 기술로 급속한 산업화를 이룩했다. 기초 없이도 초고속 경제성장이 가능함을 체험했다. 기초란 원래 필요 없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심지어 거추장스럽게 느끼기까지 했다. 사회의 도덕적 윤리와 건전성도 해이해지기 시작했다.

유럽의 경우에는 16~17세기에 코페르니쿠스-갈릴레이-뉴턴으로 이어지는 ‘과학혁명’이 인간의 사고를 뒤흔들었다. 이를 바탕으로 18세기에 ‘산업혁명’이 일어났다. 유럽은 기초과학 발전이 기술·산업 발전, 경제발전으로 이어지는 것을 체험했다. 기초과학이 인간의 가치관과 철학을 바꾸는 것을 경험했다. 우리는 이 과정 없이 눈부신 압축성장을 이룩하면서, 과학을 경제성장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기초과학에 예산을 투자하느니 필요한 기술과 부품소재를 수입하면 더 싸게 먹힌다는 경제논리는 지금도 지배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려면 기존의 방식으로는 되지 않는다. 첨단 부품소재와 원천기술을 수입해 제품을 만들다간 우리에게 남는 게 없다. 세계 일류만이 살아남는 치열한 경쟁시대다. 선진국 기업들은 국제 표준을 무기로 세계시장 쟁탈전을 벌이고 있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일부 쓸 만한 특허마저 싼값에 사들이고 있어 우리는 선진국의 기술속국이 될 판이다. 원천기술의 개발이 우리의 살길이고 그를 위해서는 기초과학이 필요하다. 미국 대통령 당선인 버락 오바마는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를 두 배로 늘리겠다고 공약했다. 과학기술 혁신이 시장을 개척하고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말했다. 경제논리에 의해서도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확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제3의 물결 시대는 지식이 주도하는 경제 사회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시장 구조와 삶을 변화시킨다. 예컨대 수학과 물리학의 모델링 기법을 이용하지 않았다면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은 정량적 학문이 될 수 있었을까. 이명박 정부의 국정철학은 ‘창조적 실용주의’다. 창조적 사고는 과학적 사고이고, 실용적 사고는 경제적 사고이다. 과학과 경제의 진정한 만남에, 인문학의 건전성이 함께할 때 창조적 실용주의가 꽃을 피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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