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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양호 신드롬’ 빠진 정부, 낫과 망치 제대로 들어라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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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호 34면

‘낫과 망치’ ‘짝짓기’ 같은 원색적 말이 미국 뉴욕에서 한국시장 투자설명회를 하던 전광우 금융위원장의 입에서 나왔다. 용어 선택 차원에서 한 나라의 금융정책을 총괄하는 위원장이 하기에는 좀 심하지 않으냐는 지적도 있다. 대통령이 연일 “금리를 내려라” “중소기업 대출을 늘려라”고 주문해도 은행들이 꿈쩍하지 않고, 금융위원회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오는 데 따르는 위원장의 ‘역할 자각론’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현실 파악 차원에서 전 위원장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엄습해 오는 공포를 잘 표현했다.

최근 일련의 경제사건을 상기해 보자. 널뛰기 환율과 주가의 급등락도 그렇지만, 전남 여수산업단지의 석유화학공장이 16년 만에 처음으로 공장 가동을 멈췄다는 것은 충격이다. GM대우공장이 일시적이라지만 멈춰 섰고 그나마 판매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일부 공장의 가동을 중단하고 인력 감원에 나선다고 한다. 건설사는 물론이고 몇 년치 수주를 받아 놓았다는 조선업계마저 휘청거리고 있다. 경기침체가 이어지고 건국 이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디플레이션의 늪에서 허덕일 가능성이 있다. 내년 우리 경제가 올해보다 더 어렵다는 것이 대부분 전문가의 생각이다. 우리나라처럼 무역 의존도가 높은 나라에서 무역 상대국이 마이너스 성장을 예상하는 상황에서는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와서야 정부가 내년도 성장률을 4%에서 2%로 수정하는 것조차 무책임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9월 위기설이 돌 때만 해도 위기설이 나올 때 치고 실제로 위기가 온 적이 있느냐고 정부는 반문했었다. 당시에는 맞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위기 상황에 대한 인식이 안이했다. 여기에는 외환은행 헐값 매각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는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의 전철을 밟을 수 없다는 관료사회의 소위 ‘변양호 신드롬’이 한몫했다. 불확실한 가운데 내린 관료의 정책적 선택에 책임을 묻는 바람에 남대문에 불이 났을 때 지붕을 뜯고 적극적으로 진화하기보다 서서 불구경을 하는 게 낫다는 복지부동 논리가 판을 치게 된 것이다.

9월 위기설 이후 정부는 무려 103조원에 달하는 유동성 지원 대책을 발표했지만 꺼져 가는 불씨 살리기 식의 정책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 이미 죽었는데 정부의 구제책이란 주술에 걸려 강시처럼 살아 돌아다니는 좀비 기업들만 만들어 냈다. 더 큰 문제는 어느 기업이 좀비 기업이고 어느 기업이 살아 있는 기업인지 분별하기조차 어렵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주단 협약이나 패스트트랙을 도입해 봤자 무슨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지금은 경제 시스템상 마지막 보루인 은행권에 대한 구조조정이 거론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다. 10년 전 외환위기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찔끔찔끔 유동성을 공급하기보다 확실한 낫과 망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다만 낫과 망치는 제대로 들고, 제대로 써야 한다.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실 채권을 털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 보강을 하는 것이다. 부실 채권은 조용하고 은밀하며 대담하게 정리해야 한다. 자본 보강은 유럽 국가들이 영국과 프랑스 주도하에 은행 국유화 공조안을 내놓고, 미국이 9개 은행에 2500억 달러를 투입해 국유화한 방식을 참조해야 한다.

낫과 망치는 위험한 도구다. 이를 사용하는 당국의 문제 해결 능력이 시원치 않으면 흉기로 둔갑한다. 더욱이 이 위험한 도구를 사용하는 과정에서 두 방법 모두 국민의 세금인 공적자금이 들어갈 것이다.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구조조정의 마스터플랜을 제시하고 설득해야 하며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얻어야 한다. 현 경제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시장의 불신을 걷어내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시장에서 이헌재식의 카리스마가 그립다는 이야기가 자꾸 나오는지 곱씹어 보아야 한다.

10년 전 외환위기는 기업의 과다한 부채 때문이었지만 지금은 기업들이 흑자인데도 도산하고 있다. 원-달러 환율의 고공행진도 한 원인이지만 은행들이 돈줄을 조이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사회 못지않게 변양호 신드롬을 겪고 있는 은행권이 연말을 앞두고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기 위해 자금 회수에 나서게 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여기에 대비한 선제적이고 충분한 조치가 필요하다. 정말 필요할 때 은행이 병들어 있다면 은행부터 수술해야 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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