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뱀에게 스치다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고재종(1957~ ) '뱀에게 스치다니!' 부분

반바지 차림의 산행길,
풀밭에 다리 쭉 뻗고 쉬는데
지게 작대기만한 뱀 한 마리가 스르륵
종아리를 스쳐 넘는 게 아닌가
(중략)
뱀에게 스치다니,
아직도 시리고 축축한 뱀의 세상이
날 그렇게 통과하다니!

그 순간 내 영혼까지 까마득해버린 건
뱀의 길이에 새겨진
태초 이래의 긴 시간에 들렸던 탓인가
그러기에 꽃방석 위엔
나비떼도 새삼 준동하던 것인가



100V의 전류가 흐르던 몸에 갑자기 몇천V의 전류가 흘러들 때, 그 엄청난 감전의 순간을 우리는'들림'이라고 부른다. 뱀이 스치는 순간 시인의 몸에는 저 까마득한 대지의 세계가 섬광처럼 빛난다. 종아리를 스치는 축축한 기운이 이렇게 영혼을 뒤흔든 걸 보면, 감각 중에서도 촉각이 가장 힘이 센 듯하다. 낮은 풀들이 소름처럼 꽃을 피운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나희덕<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