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눈>'정치금융'이 더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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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금융개혁문제로 재정경제원이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졌다.정치권으로부터 난타당하는 것은 그렇다 치고, 청와대까지 나서서 재경원의 무장해제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재경원을 배제하는 이유는개혁의 대상을 개혁작업에 끼워줘선 안된다는 논리 에서다.
재경원,좀더 정확히 말하면 금융정책을 지금까지 끌어온 구(舊)재무부출신들로선 이만저만한 수모가 아니다.
이들의.망신'은 처음이 아니다.지난 82년 전두환(全斗煥)정권초기에도 재무부는 한차례 쑥대밭이 된 일이 있었다.경제수석 김재익(金在益)이 주도해 경제기획원의 개혁파 인물들이 일거에 재무부 요직를 점령해버렸다.재무부의 금융통 터줏대 감들은 무더기로 쫓겨나야 했다.
당시의 분위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서슬이 퍼랬다.“사람을 갈지 않고서는 낙후된 한국금융을 개혁할 수 없다”는 기획원중심 개혁파의 논리가 신군부에 먹혀들었고,이를 발판으로 재무부의 장.차관뿐 아니라 차관보.이재국장.금융정책과장에 이 르기까지 줄줄이 기획원 출신들로 교체됐었다.
재무부사람들은 분통을 터뜨렸으나,이들을 이해해주는 편은 많지않았다.정부의 금융정책에 대한 일반의 불만과 원성이 그만큼 심각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5공시대 내내 재무부출신들은 별로 빛을 보지 못했다.6명의 장관중 5명이 외부출신 이었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노태우(盧泰愚)정권에 와서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재무부출신3명이 내리 장관에 앉은 것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은.재무부의 르네상스'라 할만 했다.왕년의 터줏대감들이 속속 복귀했다.아마추어 개혁파들이 물러나고 진짜 금융을 아는.프로 '들이 실력발휘할 때가 도래했다며 좋아했었다.
그러나 컴백한 이른바 프로들은 과연 무엇을 했던가.시간과 정력을 가장 많이 소비했던 일은 다름 아닌 한국은행과의 중앙은행독립시비였다.재무부와 중앙은행이 서로 힘을 합쳐도 될까말까 한심각한 형국에 양쪽 모두 진흙탕 싸움에 열심이 었다.
더구나 수많은 산하기관장에 주욱 앉아 있는 면면들을 살펴보면구재무부든,지금의 재경원이든 입이 열개라도 할말이 없게 돼 있다.관치금융의 사슬이 이처럼 지독한 것인가를 실감케 한다.
결국 우리의 금융당국은 82년에 그토록 곤욕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달라진게 없었기에 지금 와서 또다시 이런 봉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변화의 대세속에 스스로의 변화를 거부한 결과가 외부로부터의 강압을 또한번 자초한 꼴이 된 셈 이다.
하지만 82년 금융개혁이 던져주는 또 하나의 교훈에도 주목할필요가 있다.겨냥했던 재무부를 그토록 초토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금융개혁이 왜 용두사미에 그쳤는가를 곰곰 따져봐야 한다.지휘탑서부터 실무자까지 몽땅 갈아치웠는데도 왜 소기 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느냐는 말이다.
한국의 금융현실을 한꺼풀만 까뒤집으면 해답은 금방 나온다.금융낙후가 어디 관료들만의 책임인가.정부내의 특정개인이나 집단의문제라면 벌써 해결됐을 것이다.대통령부터 시작해 끗발있는 모든이들이 사방에서 그르쳐 왔는데,이걸 두고 직업 관료들만의 잘못으로 치부할순 없는 노릇이다.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책임문제를 따지자면 행정부를 향해 맹공을 퍼붓고 있는 정치권이야말로 금융낙후의 근원적인 책임을 져야 할 집단이라 할 것이다.
다른 부문들이 엉망인데,유독 금융 혼자만 앞서 가며 개혁되길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금융개혁에 대한 열망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결국은 우리 수준을 넘어설 순 없다.거울에 비춰진 숯검댕이 얼굴을 보고 거울탓만 해서는 곤란한 일 이다.관치금융의 폐해보다도 무서운 것이 정치금융 폐해다.선거의 해에 금융이더 망가지지나 않았으면 다행이겠다.순진한 기대는 오히려 실망만키울 뿐이다.
(경제1부장) 이장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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