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올림픽 30年·태권도 40年] 51. 동방불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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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표 대결을 할 때마다 우군이었던 사마란치(맨 오른쪽). 왼쪽부터 필자, 사마란치의 부인, 필자의 아내.

2000년쯤인가 “지금까지 표 대결에서 한 번도 진 적이 없다”고 하니까 그 자리에 있던 한 젊은 기자가 “그럼 ‘동방불패’군요”라고 했다. 갑자기 동방불패라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홍콩영화 제목인데 무림 고수를 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패배를 모르는 동방의 사나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뒤돌아보면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어떤 선거에서 진 적이 거의 없다. 승률 100%에 가깝다. ‘이왕 하는 선거라면 이겨야 한다’는 적극적인 자세와 국제무대에서 통하는 언어실력이 밑바탕이 된 것 같다. 운도 많이 따랐다. 결정적일 때마다 주위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평소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 이 모든 것을 합쳐서 ‘스포츠 외교’라고 부르고 싶다. 스포츠 외교는 정부나 정부산하기관에서 추진하는 외교와는 기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반면 흉금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신뢰와 친화력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건 아니다. 자주 만나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친분을 쌓아야 한다.

스포츠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얼마 안 된 1974년, 박종규 사격연맹 회장 대신 세계연맹 총회에 참석해 세계사격선수권(78년) 유치에 성공한 것이 동방불패의 시작이었다. 서울올림픽 유치는 혼자 한 일이 아니었지만 뒤늦게 뛰어들어 역전승했고, 대한민국 위상이 몇 단계 올라갔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개인적으로는 86년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당선, 국제경기연맹연합회(GAISF) 회장 당선, 88년 IOC 집행위원 당선, 92년 IOC 부위원장 당선 등 단 한 번도 실패가 없었다. 97년 무주·전주 유니버시아드, 99년 용평 겨울아시안게임,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도 잇달아 유치에 성공했다.

98년에는 IOC 집행위원회를 서울에 유치하면서 서울올림픽 10주년 행사를 동시에 개최해 IOC 위원 40명을 불러모았고, 99년 IOC 총회서울 유치에 성공함으로써 서울올림픽 이후 잊혀져 가던 한국스포츠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그런가 하면 94년 히로시마아시안게임에 이어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태권도를 정식종목에 넣는데 성공했다.

그때는 정말 자신만만했다. 표 대결이라면 자신 있었다. 사마란치 위원장이 “선거는 뚜껑을 열 때까지 결과를 알지 못한다”고 했지만 진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았다.

동방불패가 처음으로 꺾인 것이 바로 유색인종 최초로 IOC 위원장에 도전했을 때다. 2001년 모스크바 IOC 총회에서 비록 자크 로게에게 IOC 위원장 자리를 내줬지만 백인 전유물이었던 ‘세계 스포츠 대통령’에 도전해 차점자가 된 것으로 일단 만족한다. 그리고 평창이 2010년 겨울올림픽 유치에 실패한 것이 두 번째다.

김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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