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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사냥>33세 늦깎이 복서 김종길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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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언젠가 작가 박경리씨는 가장 좋아하는 스포츠를 묻는 질문에.마라톤과 권투'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42.195㎞를 쉬지 않고맨몸으로 뛰어야 하는 마라톤과 주먹을 휘둘러 상대를 쓰러뜨려야하는 권투는 모든 스포츠 중에서도 가장.시대착오 적'이라 할 만하다.두스포츠는 속도와 정보라는 현대사회의 이데아들을 외면하고 인간이 지닌 동물적 능력의 극한을 시험한다.
그중에서도 권투는 더욱 야수적이다.경기장에서 피가 튈수록 관중들이 더 열광하는 스포츠가 권투 말고 또 있을까.그나마 오늘의 권투는 많이 인간화된 것이다.현대적 룰이 도입되기 전의 복서들은 한사람이 완전히 뻗어버릴 때까지 며칠이고 주먹다짐을 계속해야 했다.노작가를 매료시킨 것은 아마도 현대의 생활세계에서사라져 버린 그 과격한 원시성이었을 것이다.
프로복서 김종길은 올해 서른셋이다.이제 물러나야 될 나이지만그는 주먹으로 세계를 제패하겠다는 꿈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명예와 돈을 가져다줄 세계 챔피언이 얼마나 화려한지를 들추는 것자체가 구차스럽다.
우리 복서들은 대부분 때리고 맞는 일이 좋아 권투를 택한 것이 아니다.관중들이 환호하는 이유와는 상관없이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혹은 가족중 병든 누구의 치료비를 벌기 위해 팬티만 입고 링에 올랐다.뒷골목 또는 들판에서 단련된 신 체와 생존본능만이 무기인 그들의 눈엔.떳떳하게'성공하기에 권투만큼 적합해보이는 게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권투는.헝그리 스포츠'의 대명사가 됐다.
김종길도 배가 고팠다.65년 전북부안에서 7남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모진 겨울 바람을 맞으며 갯가에서 굴 캐는 엄마의 모습과 함께 떠오른다.몸져 누운 아버지,가난,등록금 가져오라고 독촉하는 선생님,중학 중퇴 ….너무도 전형적인 헝그리 복서의 소년기를 앓으며 그는 83년 상경했다.
그는 권투를 좋아했다.80년.남미의 표범'이바라를 2회만에 때려누인.훅의 제왕'김태식을 세상에서 가장 존경했다.그 시대의많은 배고픈 소년들이 그랬듯 김종길도.챔프'가 돼 엄마를 호강시켜 주겠노라고 마음먹었다.맨손으로 서울에 온 그는 권투도장의문을 두드리기 전 먼저 고픈 배부터 채워야 했다.김포의 빵공장에서 그의 서울생활은 시작됐다.
그의 많은 불운 가운데 하나는 한국의 프로권투가 내리막길에 접어들었을때 힘겨운 레이스의 출발선에 섰다는데 있다.프로야구가스포츠광들의 눈과 귀를 붙들어매고,소녀들이 참으로 신사적인 농구와 배구에,그 미끈한 몸매의 허재와 강만수에 환호하기 시작했을때,그리고 TV에서 권투시합을 구경하기가 점점 힘들어져갈때 청년 김종길은 뒤늦게 샌드백을 두들기기 시작했던 것이다.85년그는 극동서부체육관(관장 김춘석)을 찾았다.그러나 권투로 성공은 커녕 주린 배를 채우기조차 힘 들다는 것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빵공장 직원.용접공.평화시장 경비….대전료로는 어림도 없는 생계유지를 위해 그가 택했던 일들이다.직장과 운동을 훌륭하게 병행하기란 불가능했다.그는 결국 공사판을 찾아나섰다.자갈을 짊어지고 높은 철골을 오르내리는 일이 고단하긴 해도 시합때는 누구 눈치 안보고 빠질 수 있어 막노동은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일거리가 됐다.그의 권투경력은 85년 11월 데뷔전을 치른 이래중단과 재기를 두번 반복했다.생계 때문이었다.아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번번이 다시 링으로 돌아왔다.
95년 2월 첫 한국타이틀 도전경기에서 그는 판정패했다.오전5시에 일어나 한시간반 동안만 로드워크를 하고 7시부터는 종일토록 공사판 일을 하는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 무릎에 이상이 생겨 맥을 제대로 못춘 탓이다.늘어난 인대를 겨우 치료하고 다시가진 9월의 타이틀 전에서 그는 드디어 주니어웰터급 한국챔피언이 됐다.
그리고 며칠 쉰 다음 다시 공사판으로 갔다.꿈에도 그리던 타이틀이었지만 한국챔피언 정도로는 쌀값 마련하기도 힘들었다.챔피언이 받는 대전료는 2백만원.거기에서 매니저와 트레이너 몫(각각33%,10%)을 빼고 나면 그의 손에는 1백만원 남짓한 돈이쥐어질 뿐이다.그나마 타이틀전은 서너달에 한번정도 찾아온다.한국에서 제일 잘해봐야 권투만으로 벌 수 있는 돈은 1년에 4백만원 안팎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프로복싱의.영광'은 이렇게 아득히 멀어지고 말았다.프로야구 2군 의 무명선수보다 더 가난한한국챔피언 김종길은 공사판에서 밥값을 벌 도리밖에 없었다.
그의 꿈은 말할 필요도 없이 세계 챔피언이다.당장은 동양타이틀부터 따야 한다.동양챔피언 역시 대전료(시합당 5백여만원)만으로 먹고 살 순 없지만 스폰서가 붙는다.그에게도 스폰서가 있긴 하다.오류동에서 맥주집(시티원호프)을 운영하는 유채수씨가 매달 30만원씩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다.아내와 세 딸을 먹여살려야 하는 그의 처지에선 그나마 고맙기 그지 없지만 좀더 굵직한 스폰서를 만나지 않으면 운동에 전념하기란 불가능하다.
***같 은 체육관 소속 후배인 최용수가 95년 10월 세계타이틀을 따면서 그의 처지는 좀 나아졌다.김춘석 관장이 바빠져체육관 일을 그에게 맡긴 뒤부터 더이상 공사판에 나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그는 느린 전북 사투리로“관장님 덕에…”라 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했다.
거리를 걸어도 그가 한국챔피언임을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그는“세 딸이 나의 유일한 오빠부대”라고 말한다.그 나이에도 왜 아직.챔프'의 꿈을 버리지 못하느냐고 그에게 묻는 것은 별 소용이 없다.60~70년대에 10대나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권투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기억한다.
유제두가 적지 일본에서 와지마 고이치를 세번 다운시키고 타이틀을 빼앗아왔을 때,홍수환이 카라스키야에게 4전5기의 거짓말같은 승리를 쟁취했을 때,그들이 얼마나 위대해 보였는지를 또렷이기억하고 있다.소년 김종길은.작은 거인'김태식처 럼 되고 싶어했고,서른이 훨씬 넘은 지금도 그 꿈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아웃복싱을 싫어한다.김태식처럼 인파이터다.말주변이라고는전혀 없어보이는 그가“인생도 그렇지 않습니까.공격이 방어지요”라고 말할 때 그에게 실리적인 충고는 별로 필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된다.그저 한국 프로권투사상 가장.늙은'세 계챔피언이 빨리 탄생하기를 기다리는게 차라리 나으리라는 것도.

<허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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