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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도마복음] 구원을 얻었다고 하자!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인가?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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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호 33면

이것이 바로 쿠푸왕의 현실이다. 너비가 5m, 길이가 10m. 천장이 400t짜리 거석 9장으로 마감되어 있는 단출하지만 웅장한 느낌을 주는 방이다. 쿠푸왕의 석관이 놓여있다. 알렉산더대왕도 이 방에서 하루를 잤다고 하고, 나폴레옹도 이 방에서 하루를 잤다고 한다. 나폴레옹이 잔 다음날 아침 그곳에서 나온 그의 얼굴이 너무도 창백하여 부하들이 걱정되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절대로 말할 수 없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결국 나폴레옹은 그 비밀을 무덤까지 가지고 갔다.

제11장
1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하늘도 사라지리라. 그리고 이 하늘 위에 있는 저 하늘도 사라지리라. 2 죽은 자들은 살아있지 아니 하다. 그리고 살아있는 자들은 죽지 아니 하리라. 3 네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는 너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 네가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는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4 네가 하나였던 바로 그 날에 너는 둘이 되었도다. 그러나 네가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81. 하나와 둘

도마복음에서 예수가 말하고 있는 인간은 항상 살아있는 인간이다. 이미 서장에서 예수는 “살아있는 예수”로서 전제되었고, “살아있는 예수”가 대상으로 하고 있는 인간은 살아있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살아있는 인간은 생명적 인간이다. 죽은 인간이 아니다. 생명적 인간은 모든 고정적 실체를 거부한다. 삶이라는 것, 진리라는 것을 삶의 과정으로 파악한다. 도마는 하늘을 고정적으로 파악하고, 그 하늘에 천국이라는 고정적 의미를 부여하는 사유를 여지없이 분쇄한다.

이 설계도에서 9번이 대회랑, 11번이 쿠푸왕 현실(King`s Chamber).

저 태양은 매일 새로워진다.
The sun is new each day. (Fr.6)
이것은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그는 또 말한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향유되는 이 질서정연한 우주(코스모스)는 하나의 신이나 하나의 사람에 의하여 창조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하고 미래에도 그러할 영원히 살아있는 불이다. 일정 양만큼 켜지고 일정 양만큼 꺼진다. (Fr.30)

빛과 어둠을 우주적 실체로서 이원적으로 대비시키는 것은 페르시아문명권의 조로아스터교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조로아스터교의 이원적 대결이 이스라엘의 쿰란 공동체에서 강렬하게 드러나고 있고, 또 초기 기독교공동체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이집트인만 해도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세계를 이원적으로 파악하지 않고 연속적 일체로 생각하였다. 죽음은 또 하나의 삶의 시작이었다. 그래서 무덤을 땅속에 만드는 것이 아니라, 찬란한 태양 아래 지상으로 솟아오르도록 건축하였던 것이다. 내가 서 있는 곳은 기자(Giza) 대피라미드 내의 쿠푸왕(Khufu, BC 2589~2566 재위) 현실로 들어가는 대회랑(Grand Gallery)이다. 이 피라미드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특별 허가를 얻어 어렵게 찍었다. 평균 2.5t의 돌이 230만 개 쌓여서 된 것이 대피라미드라고 하는데, 이곳 대회랑의 돌은 보통 20~30t은 충분히 되는 거석들이다. 매우 정밀한 기하학적 계산에 의하여 만들어진 통로인데 적석의 치밀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대회랑의 높이는 8.5m, 길이는 47m. 임진권 기자

이러한 헤라클레이토스적 사유는 헬레니즘 세계에도 팽배해 있던 사유였다. 도마의 “하늘도 사라진다”는 말을 공관복음서는 “하늘이 사라져도 내 말은 사라지지 아니 한다”(막 13:31)는 “내 말”의 불변성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도마는 그런 맥락에서 그 말을 사용치 않았다. “살아있는 자들은 죽지 아니 하리라.” 과연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3절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나 독자들은 여기서 도마복음 제7장의 메타포를 연상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복되도다 사자여! 사람이 그대를 먹어 삼키기에 그대는 사람이 되는도다.” 사자는 내 몸속에 내재하는 욕정(欲情)이었다. 인간의 욕정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내가 나의 욕정을 온전히 제어할 수 없다는 맥락에서 그것은 항상 나로부터 객화(客化)된다. 그 욕정(Id)은 나(Ego)에게 사자처럼 덮친다. 그 덮치는 사자에게 내가 삼킴을 당하면 나는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그 덮치는 사자를 내가 삼켜 먹으면, 나도 구원을 얻고 그 사자도 구원을 얻는다. 그 사자가 바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건강한 나의 일부로서 갱생의 길을 걷는 것이다. 덮치는 사자를 삼켜라!

“네가 죽은 것을 먹던 그 날에는 너는 죽은 것을 살아있는 것으로 만들었도다”라는 제3절의 메시지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먹는 것도 대부분 죽은 것이다. 채소도 뿌리가 잘리는 순간 이미 죽은 것이고, 고기도 다 죽은 것을 먹는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잘 먹었을 때는 그것은 죽은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나의 몸, 즉 생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온전하게 살아있는 인간은 끊임없이 죽은 것을 먹으면서 그 죽음을 삶으로 전환시키는 인간이다. 식생활에서뿐만 아니라 정신생활에서도 욕망과 같은 파멸적 죽음의 요소를 삼킴으로써 그 죽음을 생명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끊임없이 살아있는 자들이야말로 “죽지 아니 하리라”고 제2절에서 말한 것이다.

그 다음에 “빛 속에 거하게 되었을 때”라는 말이 갑자기 나온다. 왜 그럴까? 그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빛”은 항상 “어둠”과 대비되어 나타난다. 어둠은 죽음, 빛은 생명이다. 이것은 후대 요한복음의 기저를 이루는 생각이다. 요한복음이 도마복음보다는 훨씬 더 영지주의적이다. 도마는 그렇게 빛과 어둠의 이원성을 강하게 대비시키지 않는다.

죽음을 생명으로 전환시키는 살아있는 인간은 당연히 빛에 거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어둠의 세상에 있다는 사실만을 강조하고 그 사실에 대하여 대비적으로 “빛”을 이야기하는 것은 일종의 공갈이나 협박의 한 형태에 불과하다. 빛을 보라! 어둠의 동굴 속에선 물론 빛 한 줄기만으로도 그 가치는 엄청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빛 속에서, 세상에서 산다. 그때 빛이란 너무도 흔한 것이다. 영생을 얻으리라, 생명을 얻으리라는 것은 일종의 클리쉐(cliche:진부한 문구)에 불과하다. 도마의 문제의식은 “빛을 발견하리라” “빛을 얻으리라”가 아니다. “빛 속에 네가 일상적으로 거하게 되었을 때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정말 충격적인 말이다. 도마의 비판은 동일한 문명권의 한 사유체계인 불교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일체개고(一切皆苦)”만을 강조하고, 거기에 대한 반사적 효과로서 멸집(滅執)의 해탈을 운운하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기만이나 협박일 수도 있다. 해탈을 해서 무엇 하겠다는 거냐? 네가 열반을 얻었느냐? 열반해서 도대체 무엇 하겠다는 것이냐? 해탈의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해탈한 인간으로서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라는 예수의 질문은 두 번 반복된다. 그 질문은 독자의 사적 공간을 파괴하고 독자의 실존 속으로 직입(直入)하고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도생일, 일생이”(道生一, 一生二)를 말한다. 유대문학 전통에서 하나가 둘이 된다는 것은 자웅동체였던 아담의 갈빗대가 분열되어 이브가 된 것을 말한다(창 2:21~24). 하나였던 그 순간에 너는 둘이 되었다. 남녀가 구비된 현실적 인간으로 화한 것이다. 즉 이 세상에서, 저 하늘 아래,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또다시 묻는다: “둘이 되었을 때 과연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

인생의 과제는 오늘 여기 이 땅 위에서 네가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궁극적인 어떤 구원·해탈·열반·천국의 실체화는 허망한 기만에 불과할 수가 있다. 궁극적인 어떤 실체가 인생의 목표라는 모든 생각을 도마는 여지없이 무산시켜 버리고 만다. 역사적 예수는 과연 어떤 사람이었을까? 생각해 보고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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