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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Sunday] 이헌재 같은 악역 어디 없소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88호 35면

이명박 대통령이 요즘 은행들 때문에 단단히 뿔이 났다.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들을 위해 돈을 좀 풀라고 여러 차례 얘기했건만 은행들은 요지부동이다. 대통령의 발언 수위는 ‘당부’를 넘어 이제 ‘경고’로 치닫고 있다. 가히 대통령과 은행 간의 전쟁이라 할 만하다.

이 대통령의 말인 즉 틀린 게 없다. “은행들이 비가 오는데 우산을 빼앗고 있다. 정부가 돈을 풀어 봐야 은행 창구가 막혀 있으니 기업이 쓰러진다”는 게 대통령 발언의 요지다. 은행 돈을 쓰고 있는 기업과 가계는 대통령 얘기가 맞다며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런 행보는 몇 가지 위험 요소를 안고 있다.

우선 본의 아니게 사태의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는 점이다. 냉정히 따져 보자. 지금의 경제위기가 과연 국내 은행들 때문에 비롯된 것인가. 은행 문제는 위기 상황에서 튀어나온 파편에 불과하다. 전쟁에 비유하자면 적의 주력군이 대로를 따라 밀고 내려오는데 아군은 산속의 몇몇 낙오병을 향해 집중 포화를 날리고 있는 꼴이다. 전력 낭비요, 시간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둘째는 대통령의 리더십과 권위가 손상될 위험이다. “우산을 뺏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점잖은 얘기로 끝냈어야 했다. 그 후론 정부 조직과 시스템을 통해 문제를 풀어 나가야 했다. 최근 한 달 새 은행 비판만 여섯 차례였다. 대통령의 촘촘한 현장교시형 행보에 시장은 면역성을 보일 정도다. 펀드 투자자들이 화가 났으니 다음엔 대통령이 펀드회사들을 질타하는 것 아니냐는 소리까지 나온다.

밀어붙여서 될 일이 있고, 그래도 도저히 안 될 일이 있다. 은행들 사정도 헤아려야 답이 나온다. 은행 대출은 일선 창구에서 이뤄진다. 은행장이 하는 게 아니다. 창구 담당 직원이 도장을 찍어야 돈이 나가도록 돼 있다. 창구 직원들은 “대출한 돈을 떼이면 내가 책임져야 한다. 은행장이야 임기를 마치면 그만이지만 난 오래 다녀야 한다”고 항변한다.

사실 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과거의 대통령들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은퇴한 한 금융계 인사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 시절 얘기를 들려줬다. 오일쇼크가 강타하면서 10%를 넘었던 경제성장률이 5%대로 급전직하한 때였다. 은행 창구가 얼어붙고 중소기업들이 줄도산의 위기에 떨어야 했다. 박 전 대통령이 은행장들을 불러 대출을 지시했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돈은 잘 돌지 않았다. 은행 창구가 문제라는 보고를 받은 박 전 대통령은 “그렇다면 내가 책임질 테니 그들에게 면책특권을 주라”고 명령했다. 그 뒤 한동안 은행 일선 창구에는 ‘면책’이라는 큼지막한 도장이 비치됐다. 직원들은 대출 서류의 자기 도장 옆에 그 도장을 찍어 돈을 내보냈다고 한다.

10년 전 외환위기 때도 사정은 비슷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헌재 전 금융감독위원장에게 전권을 위임했다. 이 전 위원장은 은행들에 무조건 돈을 풀라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 대신 기업구조조정위원회라는 민관 합동의 특별 기구를 만들어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갔다. 이 기구는 살릴 기업과 죽일 기업을 철저히 갈라 공표했다. 은행들은 그 결정을 순순히 따랐다. 부실의 옥석이 가려졌으니 한결 편하게 돈을 풀 수 있었던 데다 사후 책임까지 이 기구의 몫으로 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도 은행에 뭔가 퇴로를 열어주는 방식을 도모해야 한다. 정부가 나서 은행의 자본 확충을 도와주면서 새 워크아웃 조직을 서둘러 가동시켜야 한다. 모두 살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자칫 희생만 키울 수 있다. 실물 위기라는 제2의 쓰나미가 밀려오고 있다. 시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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