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그때 그 약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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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국가경영 혹은 정치행위에는 불가피하게 모든 수단이 허용되므로 정직하거나 성실함으로써 자신의 지위가 약화될는지도 모른다고판단될 때는 약속파기나 위선도 무방하다”는 논지를 편 사람은 16세기 이탈리아 정치사상가 마키아벨리였다.묘하게 도 이 이론은“모든 인간은 악하다”는 동양적 성악설(性惡說)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모든 인간이 선하다면 이 논리도 통하지 않겠지만,악한 사람들 속에서 선만을 행하려다가는 망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서는 악하게 행동해도 무 방하다는 것이다.
그같은 마키아벨리즘은 뒷날 많은 학자들에 의해 악인들을 정당화시켰다는 이유로 매도됐지만 국가경영의 현실에 있어서는 20세기까지도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마자린 추기경으로부터 마키아벨리의 통치원칙을 그대로 이어받았고,나폴레옹 1세는“나는 보통사람이 아니므로 도덕이나 윤리에 관한모든 규범은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호언했다.레닌.스탈린.히틀러등 통치자들도 그들의 정치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약속파기.거짓말.위선.무자비를 밥먹 듯 행한 인물들이었다.
특별한 경우에 한해 정치인들이 도덕.윤리에 관한 규범을 무시할 수도 있다는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더러 있다.하지만 거짓말은 어디까지나 거짓말이요,약속파기는 어디까지나 약속파기다.
뿐만 아니라 거짓말이나 약속파기가 용인된다 해도. 특별한 경우'의 한계는 여전히 모호하다.
분명한 것은 옛날과 달리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악하지도 않을 뿐더러 정치인들의 참말과 거짓말,지켜질 약속과 지켜지지 못할 약속을 거의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다는 점이다.당장은 몰라도 시간이 흐르면 신뢰할 수 있는 정치인 인지 아닌지는 판단해낼 수 있다는 얘기다.
국민회의가 당보에서.김영삼정권 4년,그때 그 약속 지켜지고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대선 당시의 공약에 조목조목 맹공을 퍼부었지만 공약 실천 여부는 우리 정치인 모두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나는 거짓말도 약속파기도 한 적이 없다”거 나“나는 정직하고 성실하다”고 자신있게 외칠 수 있는 정치인들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제발 올해 대선에서만은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나거짓말들이 자취를 감췄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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