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년과 다른 주요 그룹 97시무식 이모저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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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3일 오전8시50분 서울여의도 LG쌍둥이빌딩 지하 1층 대강당.그룹 시무식에서 5백여명의 임직원들은 예년과 마찬가지로 서로 악수를 나누며 밝은 얼굴로“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했다.오전9시 시무식이 시작된지 10분뒤 구본무 (具本茂)그룹회장이 신년사를 발표하기 위해 단상에 올랐다.그의 얼굴은 굳어 있었다.밝은 한 해를 시작하는 행사인 시무식에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였다.강당 안은 일순 조용해졌다.
具회장은 임직원들을 향해 단호한 어조로“지난해 그룹 경영실적은 부진했다.취약한 사업구조 때문이다.올해는 과감한 군살빼기에전임직원이 노력해 달라”고 요구했다.마치 신년사가 아니라 결전을 앞둔 장수의 전술지시 같았다.단상 아래 있던 사장단에서 일부 최고경영진들이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지난해 실적이 부진했던 일부 계열사 임직원들은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具회장은 이어“지금은 어려운 시기다.부진한 사람들을 과감히 버리고 승부할 수 있는 사업을 길러라.능력보다 결과를 놓고 성적을 매겨라”고 임직원들을 독전(督戰)했다.이날 그룹 경제전문연구기관인 LG경제연구원은 올해 3대 경영포인트로 ▶사업구조 개편▶정보화 경영체제 구축▶철저한 성과주의를 제시했다.
LG뿐 아니다.
같은 날 오전8시 서울 신라호텔에서 서울소재 계열사 임직원 7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린 삼성그룹 시무식도 비장감이 감돌았다. 이건희(李健熙)회장은 전국 3백84개 사업장에 위성통신으로 중계된 신년사를 통해“희망찬 새해가 아니라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는 새해”라며 말문을 열었다.李회장은“경제위기는 어제 오늘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며“국민소득 1만달러, 수출 1천억달러의 허상에 만족하며 3저(低)와 엔고(高)라는 좋은 기회를 헛되이 놓쳐 버리고 이제 뒤늦게 그 대가를 치르고 있다”고 말했다.
李회장은“21세기를 준비하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불과 3년뿐”이라며“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뜨거운 정열,비장한 각오,불멸의 삼성혼”이라면서 임직원들의 정신 재무장을 촉구했다. 서울계동 사옥 지하강당에서 열린 현대그룹의 97년 시무식도 무거운 분위기속에 시종 진지한 모습으로 진행됐다.정몽구(鄭夢九)회장은“올해는 그룹창립 50주년이 되는 해”라고 서두를꺼낸 뒤“고비용.저효율이라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 가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鄭회장은 이어 경기도용인의 현대인재개발원으로 계열사 부사장급 이상 1백여명과함께 이동해 이날부터 1박2일간의 97년 경영전략세미나에 들어갔다. 鄭회장은 현대의 올해 6대경영과제로▶기술개발▶국제수지 적자 해소▶노사관계 선진화▶인재양성▶환율불안 극복▶책임경영풍토조성등을 제시했다.
한진그룹 조중훈(趙重勳)회장은“지난해 그룹매출은 계획에도 3% 못 미쳤으며 적자까지 기록했는데 이는 제반 경영여건이 어려웠다지만 지극히 부진한 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남들이다 한다고 우리도 따라 하는 식의 창의성이 결여 된 모방사업은하지 말것”을 강조했다.
쌍용그룹 김석준(金錫俊)회장은“타성이나 패배주의.부정적 사고가 아닌 변화를 갈망하는 위기의식과 확신에 가득찬 도전의식,긍정적 긴장감등이 절실히 필요한 때”라고 말해 현 경제상황에서 오는 위기감을 반영했다.
한화그룹 김승연(金昇淵)회장은“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자세”를 강조했고,기아그룹 김선홍(金善弘)회장은“위기는기회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말로 임직원들의 분발을 촉구했다.
금호그룹 박정구(朴定求)회장은“대기업병을 추방하 고.집념의 금호인'으로 새롭게 출발하자”고 말했다.
시무식에서부터 주요그룹 임직원들은 정신적으로 무장할 것을 강조받았다.실현 불가능한 장밋빛 미래청사진이나 새해인사로 웃고 넘어가는 예년의 시무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대통령선거.대외개방.불안한 노사관계등을 앞둔 올해 우리 기업들 이.비상사태'를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민병관.이원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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