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丑年 소띠해 소 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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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정축년(丁丑年)은 소의 해다.그 어느 해보다 다난했던 병자년(丙子年)쥐의 해가 꼬리를 감추면서 황소걸음으로 성큼 소의 해가 다가왔다.귀여운 송아지,자애로운 어미소,늠름한 아비소가 주인인 소의 해가 환히 밝아왔다.
우리는 흔히 이맘 때면 무슨 띠는 좋고 무슨 띠는 언짢다며.
띠타령'을 한다.그러나 알고 보면 이 열두띠라는 것은 그처럼 우열장단으로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한 필의 비단을 짜는데 꼭 있어야 하는 씨줄과 날줄의 관계와 같은 것이라 하 겠다.
예부터 사람과 가까운 가축을 육축(六畜)이라 하여 소.말.돼지.양.닭.개를 꼽는데 이 가운데서도 소가 가장 오래고 가까운동물이다.
전설적인 존재이기도 한 농사의 시조 신농씨(神農氏)의 모습이몸뚱이는 사람이요,머리는 소(人身牛頭)인 것을 보면 이미 원시시대부터 농사가 사람과 소의 합작으로 이뤄졌음을 상징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우리 민족이 소를 사육한 역사도 아주 오래다.
고고학자들이 석기시대 유적들에서 소가 가축으로 길러졌음을 밝혔는가 하면,서력(西曆)기원전 1~2세기로 추정되는 김해의.조개무지'에서도 소 이빨이 나오고 있다.고려시대 역사책.삼국유사'는 3~4세기께 쟁기로 밭갈이를 하고 수레를 만 들어 끌고 탄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밖에도 생생한 벽화자료들이 있다.
기원전 357년 만들어진 고구려의.안악 3호분'에는 누렁소.
검정소.얼룩소가 구유에 담긴 여물을 먹고 있는 그림이 나온다.
기원전 407년에 만든.덕흥리 고분'에는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고삐를 쥐고 소를 끄는 견우상과 개를 데리고 서 있는 직녀상이 전설적 가상의 세계를 마치 현실처럼 표현하고 있는.견우직녀도'가 있다.
5세기.용강 무용총'에서는 바퀴 달린 가마를 끌고 가는 소의그림을 볼 수 있다.5세기말.쌍영총'에는 큰 가마에 지붕을 씌우고 안팎을 비단으로 장식한 호화로운 승용 가마를 끌고 있는 늠름한 소의 그림이 있다.
멀리 외국의 한 예를 들어보자.
메소포타미아.이집트등에서는 소를 이용한 농경의 시초를 기원전3천년께로 보고 있으며,그 이전의 농사는 주로 여자가 괭이로 땅을 일궜다고 한다.남자는 전쟁과 사냥을 맡았던 탓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소를 동력원으로 한 농경의 시작은 농사기술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왔다.밭갈기를 거쳐 멍에를 씌워 수레를끌게 하기에 이르면 그것은 오늘날의 .경운기'요 .승용차'의 효시였다.
소가 전쟁에 쓰여진 예도 많은데 중국 제(齊)나라 때의 한 기발한 작전을 소개한다.
나라 땅의 대부분을 연군(燕軍)에게 빼앗기자 1천여마리의 소로 이를 공격,격파했는바 소에 용을 그린 붉은 비단옷을 입히고뿔에는 날카로운 창과 검을,꼬리에는 기름에 적신 갈대를 단단히묶은 다음 한밤중 꼬리에 불을 붙여 미리 뚫어 놓은 성벽의 구멍으로 일시에 내모니 그것은 흡사 오늘날의 불을 뿜는 탱크 기계화사단에 견줄만한 것이었다.
끝으로 소와 사람 사이의 따사로운 사연들을 엮어 본다.
전통사회에서 소는 바로 한 식구였다.안채 부엌에서는 사람의 밥을 지었고 사랑채 부엌에선 쇠죽을 쑤었다.한밤중 외양간에서 들려오는 목방울 소리는 포근한 속삭임이었다.
호랑이에 못지 않은 힘이 있으면서도 사람에게는 항시 유순하기만 소.전 생애를 꾸준한 노력과 희생으로 마무리하면서도 너그럽기만 한 소의 심성 앞에 우리네 영악한 사람들은 부끄러울 수밖에 없다.
바라옵건대 1997년 소의 해에는 소의 마음씨를 본받아.나'만이 아닌.이웃'도 함께 생각하는 그런 한해가 됐으면 한다.
심우성<민속학자.공주민속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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