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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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크레디트 신에 베이컨의 그림이 놓여있다.둥근 붓끝이 일그러뜨린 허연 육체가 주홍색 소파나 회색의자 위에 우두커니.얹혀'있는 형상..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의 출발점과 도착지는 이 비틀린 인간육체의 감각적인 형상이다.
중년남자 폴의 발 앞에 세상은 지옥이다.
자살한 아내에게 자신과 똑같은 차림으로 다른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보내던 정부가 있었음을 알고 거리를 배회하던 그 지옥의어느 계절에서 그가 잔을 만난다.
아니 부딪친다.그리고 마치 오래된 연인이라도 되는듯 느닷없이뒤엉켜 정사를 벌인다.카메라는 이후 거의 창고나 다름없는 허름한 지상의 방 한칸에서 헐벗은 사랑을 나누는 둘의 육체에 주목한다. 육체면 될뿐 이름은 필요치 않다.폴은 이름을 말하지 말라고 잔에게 악을 쓴다.
그러나 잔의 약혼자 톰에겐 모든 것이 필요하다.잔이 입은 옷,그녀가 서있는 거리와 쏟아지는 빛,그늘,비,그 위에 흐르는 음악까지 중요하다.톰은 모든 걸 기록하려는 자고 폴은 모든 기억을 지우려는 자다.잔은? 아무 것도 상관않는다.
그래서 카메라와 성기 사이에서 분열하지 않고,양쪽을 오가며 그대로 분할된 채 영화를 이끌어 나간다.화면은 끝없이 잘린다.
반투명 유리.벽.기둥.소파.지하철,그리고 어둠은 인물 사이에언제나처럼 그렇게 놓여져 있다.그 안에서 폴과 잔은 밑도 끝도이유도 없이 관계를 갖는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황폐하게 만들었는가.감독은 눈치챌 수 있을 만큼만 말한다.60년대 내내 세계를 뒤흔들어 가치의 전복을 주도한 정신성,곧 살부(殺父)의식.육신의 아버지와 이성.리얼리즘.선의등 온갖 정신의 아버지에 대한 혐오와 거부는 이 영화를 복류하는 모티브다.육체의 감각만이 실존해 있는 저 도발적인 풍경의 근거가 이것이다.
폴은 전투적으로,무언가 복수하듯이 섹스에 열중하며 잔은 난파선처럼 출렁거린다.
분노한 작곡가가 완성된 악보에 함부로 펜을 휘두르듯이,화가가캔버스를 찢듯이,드러머가 자신의 허벅지.머리.가슴을 난타하듯이그들은 으르렁대며 육체를 탐한다.
그리하여 육체와 정신을 학대한다.서로의 인생.꿈.시간.관계를상처내고 단지 몸뚱어리가 된다.극도로 성난 물질이 된다.그 방은 물질로 충일한 공간이 된다.
섹스가 쾌감을 위한 도구이기를 멈추고 지상의 절망을 증거하는무기로 쓰이는 순간이다.상징의 과잉이 아쉽지만 이 정도면 꽤 근사한 도발임에 틀림없다.
(영화평론가) 김정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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