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 별장촌 통째로 빌리기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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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결혼을 앞둔 남녀에게 ‘3전(轉)1향(響)’은 혼수품의 기본이었다. 소속 직장이 신랑 쪽에 주택을 주던 계획경제 시대에 혼수품은 대개 신랑 몫이었다. 준비해야 할 품목은 재봉틀·자전거·시계처럼 ‘돌아가는(轉)’ 공산품과 ‘소리 나는(響)’ 라디오였다. 마오쩌둥의 초상화 앞에서 ‘붉은 성경’(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혼인서약을 했다.

결혼 40년째인 천훙(陳紅) 부부는 “당시엔 결혼식이라고 부를 만한 예식 절차가 없었다. 조촐했다. 가까운 친지와 지인들이 혼주 측에서 준비한 술자리에 모여 덕담을 주고받았다. 축하주와 축하 사탕을 나누는 게 전부였다”고 설명했다.

모두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하객들은 축의금도 준비했다. 천훙의 부인 선유친(沈幼琴)은 “10위안(약 2000원)을 내면 체면이 깎이지 않는 금액이었다”고 말했다. 세숫대야·냄비 등 가재도구를 선물하는 이도 있었다. 현금보다 더 귀중한 ‘현물 축의’였다. 당시엔 돈이 있어도 지역 상점이 발행한 상품별 구입 표(소금·식용유·자전거·비누 등)가 없으면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 결혼식은 호화판으로 펼쳐진다. 예식·혼수·축의금 등 모든 측면에서 한국 뺨치는 수준이다. 결혼 전문 예식장이 없는 중국에선 고급 호텔이나 대형 회관을 빌려 웨딩마치를 한다. 부유층은 호반에 딸린 별장촌을 통째로 빌리고 10여 대의 외제차로 카퍼레이드를 한다. 최근 친구 결혼식에 참가한 가오샹(高翔·여)은 “연회석 규모가 100석이 넘었는데 호텔 결혼식은 이 정도가 평균 수준”이라며 “하객들이 타고 온 차량들로 길이 막힐 정도였다”고 전했다.

IT업체에 근무하는 리화(李華·29)는 “직장 동료들의 축의금 봉투엔 적어도 300위안이 들어간다”며 “친한 경우엔 500위안도 한다”고 말했다. ‘싼다젠(三大件:집·자가용·현금)’은 부유층의 필수 혼수품이다.

중국 가정의 다용도실을 차지하고 있는 드럼형 대형 세탁기는 30년 전 꿈도 꿀 수 없던 생활용품이었다. 비좁은 침실과 주방으로 이뤄진 좁은 ‘배급 주택(福利分房)’에 들여놓을 수 없는 부피였다. 하지만 요즘엔 공간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 신만보에 따르면 개혁·개방 30년 동안 1인당 평균 거주 면적은 네 배로 넓어졌다. 98년 주택개혁 이후 다양한 형태의 아파트가 시장에 쏟아졌다. 100㎡(약 30평) 안팎의 일반 아파트뿐만 아니라 200㎡ 이상 고급형 주택이 천차만별의 가격에 팔린다. 취향에 따라 거액의 돈을 들여 별도로 인테리어 공사를 하는 것도 한국과 닮은꼴이다.

정용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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