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gain 2004, 국회는 지금 제2차 이념전쟁 중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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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06면

데자뷰. 실제로는 아니지만 전에 어디서 한 번 본 듯한 느낌을 말한다. 수도권 규제완화나 감세 등 이명박 정부의 경기부양책을 놓고 벌어지는 최근의 경제 이념논쟁은 타임머신을 타고 4년 전으로 날아간 기분이 들게 한다.

종부세 감세 … 수도권 규제완화 … 立法 둘러싼 여야 대격돌

#1=2004년 11월 11일 여의도는 시끄러웠다. 과반수(153석) 의석을 자랑하는 열린우리당이 국가보안법·사학법·언론관계법과 과거사 관련법 등 이른바 ‘4대 개혁입법’을 밀어붙이면서 정국은 요동쳤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당의 운명을 걸고 막겠다”며 배수진을 쳤고 국론은 두 동강 났다. “당론이 정해지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한다”는 천정배 원내대표에 대해 이부영 의장이 “산이 높으면 돌아가야 한다”는 속도조절론을 펴면서 여권 내 파열음도 커져 갔다. 참여정부의 회심작이라는 4대 입법은 결국 집권층의 분열과 상처만 남긴 채 실패했다. 무기력한 과반수 여당이라는 낙인이 찍힌 열린우리당은 “100년 넘는 정당을 만들자”는 구호가 무색하게 4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스스로 간판을 내렸다.

#2=9월 23일 종부세 과세기준을 6억원에서 9억원으로 올리겠다는 정부·여당의 발표에 대해 민주당은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맞불을 놓았다. “종부세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질 것 같다”는 6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의 실언이 사전 접촉 파문으로 비화되고 있는 것도 사안의 폭발성을 말해준다. 여기에 정부가 최근 발표한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에 대해 정치권에서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대결이라는 보기 드문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있다. 쇠고기 파동 이후 정치 현안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던 박근혜 의원마저 “수도권 규제완화부터 하는 것은 선후가 바뀐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6일 아침 조찬 강연회에 참석한 청와대 박병원 경제수석은 여당 의원들의 항의성 발언이 이어지면서 진땀을 뺐다.

최근 경제정책을 놓고 정치권 안팎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심한 이념대결은 ‘어게인(AGIAN) 2004’라 이름 붙일 만하다. 4년 전의 논란이 주로 사회적·사상적 이슈였다면 이번에는 종부세·상속세 등 감세와 수도권 규제완화 같은 경제적 이슈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결의 틀이 그대로 녹아 있다. 결국 이명박 대통령이 이념논쟁을 감수하고라도 우파 성장정책으로 승부수를 던지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사회주의자라는 비판까지 들었지만 결국 뉴딜 정책으로 미국 경제 회생의 영웅으로 칭송받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성공을 모델로 삼았다는 분석마저 제기된다.

종부세 위헌 여부 13일 결정
뜨거워지고 있는 종부세 논란은 올해 종부세 고지서 발송 시한 이틀 전인 13일 내려질 헌재 결정이 분수령이다. 현재 분위기로는 전면 위헌 결정보다는 세대 합산 등 일부 조항에 대해 위헌 내지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질 가능성이 큰 것으로 전해진다. 이 경우 일단 정부의 종부세 개편 방침은 탄력을 받겠지만 구체적 방법과 시기를 놓고 또다시 진통이 예상된다.

특히 개인과세 전환과 별도로 과세기준마저 9억원으로 올리는 안을 여당이 추진할 경우 이를 반대하는 민주당과 극한 대립 양상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종부세 논란이 확산되면서 여권 내에서조차 “헌재 결정을 보고 해도 될 것을 지나치게 서둘러 발표해 정치적 부담만 가중시키고 있다”(이한구 의원)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박희태 vs 홍준표, 다른 목소리
정부는 지난달 30일 수도권 산업단지 내 공장 신설과 증설을 내년 3월부터 전면 허용하는 내용의 수도권 규제완화 방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역대 정권들이 지켜온 수도권 정책 기조를 뒤집는 것은 물론 현 정부가 최근까지 내세웠던 ‘선 지방발전-후 수도권 규제완화’ 방침과도 충돌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한나라당 내에서도 계파를 초월한 갈등이 표면화되고 있다. 당의 두 핵심 기반인 수도권과 영남권의 ‘분화’ 조짐마저 보인다. 수적으로만 보면 수도권 규제완화를 찬성하는 의견이 우세하다. 18대 총선에서 수도권에서 84석을 획득한 반면 영남권 등 비수도권은 66석에 그치면서 당의 무게추가 수도권으로 기울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남 남해 출신인 박희태 당 대표와 서울 출신인 홍준표 원내대표가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낼 정도로 당내 의견 대립이 심각하다.

민주당도 사정은 비슷하다. 수도권 규제완화 반대를 사실상 당론으로 하고 있지만 수도권 지역 의원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입장 차가 감지되고 있다.

정부가 재정지출을 10조원 확대하는 내용의 내년도 수정예산안을 제출하고 각종 부동산 규제완화 정책을 발표한 것에 대해서도 여야는 입장을 달리한다. 여당은 경기 활성화를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반면, 야당은 정부 예산안이 “토목공사 위주의 예산안”이라며 지출 확대분을 서민과 중산층을 위해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 온 미국 민주당 오바마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FTA 비준 동의 문제도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다. 한나라당이 이번 정기국회 상정을 통한 ‘선 비준’을 주장하는 데 비해 민주당은 피해 산업 분야에 대한 대책을 우선 마련한 뒤 비준 동의해야 한다며 반대하고 있다.

주목되는 유선호 법사위원장의 선택
각종 경제 관련 법안을 비롯해 사이버모욕죄와 ‘떼법’ 방지법 도입,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등 이른바 MB 정부의 중점 법안들이 속도를 내게 되면서 국회 법사위가 여야 격돌의 최전선이 될 전망이다. 한나라당이 각 상임위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모든 법안이 거쳐야 하는 법사위의 위원장은 민주당 유선호 의원이 맡고 있다.

실제로 2004년 말 ‘4대 입법’이 무산된 큰 이유 중 하나는 한나라당 최연희 의원이 법사위원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 위원장도 4일 기자들과 만나 “여당이 시한을 정해 놓고 무조건 처리해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면 직을 걸고 대처하겠다”며 배수진을 쳤다.

각종 법안이 법사위의 벽을 넘지 못할 경우 국회의장 직권으로 본회의에 상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 여야가 극한 대결로 치닫는 것이 불가피해 명분을 중시하는 김형오 국회의장이 이에 응할지는 미지수다. 명지대 김형준 교수는 “과거 열린우리당이 4대 입법에 집착하다가 개혁의 호기를 놓친 것처럼 여당이 수적 우위만 믿어서는 안된다”며 “성장과 효율 같은 보수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균형과 분배 등 진보적 가치도 함께 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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