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면 된다는 ‘묻지마 교육’이 학습장애 불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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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호 15면

자녀의 성적이 지나치게 기대 이하인 경우 학습장애 등이 없는지 정확히 체크해 보는 게 좋다.

내년부터 서울 시내에도 국제중 두 곳이 문을 열게 되면서 초등학생 사교육에 대한 부모들의 관심이 더 뜨거워지고 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 잘나고 행복하게 키우고 싶은 것은 모든 부모의 바람이다. 하지만 아이들로선 어릴 때부터 무작정 과열 교육의 현장으로 내몰리는 게 현실이다. 사교육의 압박 속에서 아이들은 “엄마 때문에 못 살겠다”고 불평하고, 어머니들은 “내 아이만 뒤처진다”는 생각에 경제적으로 무리를 해서라도 뭐든 시키려 하다 보니 여간 스트레스가 아니다. 어떻게 해야 자녀와 부모가 모두 행복한 교육이 가능할까.
 
초등생 사교육은 하루 한 과목 이내
학업 성적 향상을 위해선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몰아붙이는 ‘묻지마 교육’부터 자제해야 한다. 영재는 타고나는 측면이 강하다. 교육의 힘만으로는 탄생하지 않는다. 따라서 타고난 적성을 최대한 높여주는 개개인의 능력별 학습법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유아기엔 ‘발달 평가’를, 5세 이후엔 ‘지능지수(IQ) 검사’와 ‘적성 검사’를 받아보자.

전달하는 지식의 내용과 양도 연령에 따른 ‘중용’의 미덕을 지켜야 한다. 과잉 학습은 불안·초조·짜증 등 정서적 문제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학습 효과도 감소된다. 예컨대 음악성을 키우기 위해선 일단 재미있게 따라 할 수 있도록 연령대에 맞는 음악을 많이 들려준 뒤 악기를 가르쳐야 한다.

만일 부모의 권위로 학습을 강요할 경우 정서 불안·창의력 저하는 물론 성장과 더불어 의존성·반항심이 증폭된다. 전문가들은 초등학생에게 사교육을 시킬 때는 아이가 동의한 경우라도 ‘세 종류 이하’(영어·수영·피아노식)를 ‘하루 한 과목’만 시키도록 권한다. 또 한 번의 강의 시간도 연령별 최대 집중력 시간을 고려할 때 40분 이하가 적당하다.
 
저학년 땐 지능 나빠도 우등생인 경우 있어
전문가의 권유대로 교육을 시켰지만 성적이 처진다 싶을 땐 공부 못하는 원인부터 파악해야 한다. 성적이 나쁜 가장 흔한 이유는 지능 저하다. 통상 IQ가 70~90 정도인 경우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별문제 없이 넘어가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성적이 점점 떨어진다. 공부할 양도 많아지고 내용도 복잡해지다 보니 열심히 해도 4~5학년부터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기 힘들다. 이런 아이에게 무작정 공부만 시키다간 성적 향상 효과는 미미한 반면 정서 불안으로 짜증 많고 우울한 아이로 변할 가능성은 커진다.

10세인 A군의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초등학교 1, 2학년 땐 하루 종일 아이의 성적과 씨름하는 어머니 덕분에 우등생에 속했다. 하지만 3학년부터 시험에서 틀리는 개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어머니의 닦달은 점점 더 심해졌고 쾌활했던 A군은 말수가 줄고 매사에 짜증 많은 아이로 변했다. 마침내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학습장애 클리닉’을 방문했다. 몇 가지 검사 후 담당의사는 “A군의 문제점은 성적 저하가 아니라 어머니의 과욕”임을 지적했다. IQ가 85로 나온 것이다. 그 의사는 또 “앞으로 어머니의 생각과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A군은 신경증, 반항장애 등의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후 어머니가 성적에 대한 집착을 버리면서 A군은 다시 해맑고 또래와 잘 어울리는 4학년생으로 돌아왔다.
 
읽기·쓰기 장애도 ‘지진아’로 오인 가능
집중을 못하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 환자는 지능이 좋아도 공부를 못하기 마련이다. 다행히 이 병은 원인이 되는 뇌의 이상을 교정해 주는 약물이 개발돼 있다. 약물을 복용하면 충동적이고 산만한 태도가 좋아지고, 성적도 본인의 능력만큼 향상된다. 단, 증상이 좋아져도 약물치료는 최소한 1년 이상 장기간 지속해야 한다. 병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치료가 지연될 경우 아이는 학교와 집에서 “공부는 안 하고 부산하다”며 혼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어른과 사회에 대한 적개심만 키우게 된다.

가정 불화, 친구 관계 악화 등의 이유로 우울·불안·초조 등 정서 문제가 생긴 아이도 성적이 능력보다 떨어진다. 이런 아이는 3개월 정도 약물치료와 상담으로 정서 문제를 해결해 주면 성적도 덩달아 향상된다.

드물지만 읽기나 쓰기 장애, 산수 장애 등 특수학습장애 환자도 성적이 나빠 지진아로 오해받기 쉽다. 특정 뇌 부위 이상으로 글자·부호(더하기·빼기 등)·숫자 인식이 제대로 안 되는 게 문제다. 따라서 ▶3~4세 이후에도 말 표현이 어눌할 때 ▶위아래, 좌우 등 시공간 인식이 힘들 때 ▶글자나 숫자를 거꾸로 쓰고 읽거나 원·네모·세모 등을 제대로 못 그릴 때는 정밀 검사를 받아야 한다. 장기간의 특수교육이 해결책이다.



도움말 주신 분=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정유숙 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유한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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