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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롱 속 악기들 다시 세상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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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여유가 없었어요.” 외식업체 매장에서 일하는 박미영(26)씨는 바이올린 연습을 그만둔 이유에 대해 한 마디로 답했다. 12살 때 아버지로부터 선물 받은 바이올린에 푹 빠져 살던 그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급격히 어려워졌다. 바이올린 소리는 더 이상 울리지 않았다. 바이올리니스트를 꿈꾸던 소녀의 삶에서 음악은 그렇게 사라져갔다.

“바이올린을 창고 한 켠에 넣고 악바리처럼 살았어요. 학교, 아르바이트, 집. 그게 생활의 전부였어요.”

전문대를 졸업한 후 4년제 대학 편입을 준비하면서도 아르바이트는 쉬지 않았다. 결국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고 직장에서는 정직원이 됐다. “이제 인생의 여유를 찾아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가 요즘 쓸만한 바이올린을 찾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의 ‘시민 체임버 앙상블’에 지원했기 때문이다. 클래식 악기를 연주하는 아마추어 20여 명을 뽑아 작은 오케스트라를 꾸리는 계획이다.

◆‘시민 오케스트라’ 신청 열기=7일 접수 마감을 앞둔 6일 현재 지원자가 230명이 넘게 몰렸다. 아이디어를 낸 세종문화회관도 예상치 못 한 열기였다. 홍보팀 강봉진씨는 “지원자 중 서류심사만으로 단원을 뽑을 계획을 최근 바꿨다”고 설명했다. 예상보다 많은 사람이 몰리자 오디션을 열어 단원을 선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어릴 때 악기를 포기해야했던 미영씨는 물론 주부, 공무원, 회사원 등 다양한 아마추어 연주자들이 앙상블에 지원했다. 30년 동안 취미로 바이올린을 연주한 주부 정은채(49)씨는 “고3 수험생 엄마로서의 임무를 완수한 올해, 내 꿈도 이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지원서를 냈다. 피아노를 잘 치던 언니에 밀려 바이올린을 제대로 공부해보지 못했던 회사원도 원서를 냈다. 친구의 결혼식마다 클라리넷을 연주해 주던 회사원, 더블베이스를 연주하고 싶은 공익근무요원, 군악대에서 색소폰을 불었던 약사 등도 모였다. 번역가, 컬러리스트, 은행원 등 직업도 다양하다. 프로로 활동하는 지휘자까지 “지휘자로의 기회를 얻고 싶다. 아마추어를 이끌 자신이 있다”며 지원서를 제출했다.

◆“무대를 꿈꾸며”=음악평론가 장일범씨는 이같은 지원 열기에 대해 “클래식 음악을 즐기는 사람들의 범위가 생각보다 훨씬 넓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라고 해석했다. 보통 사람들이 만든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인기가 한몫한 것도 사실이다. 세종문화회관은 지원자 중 전문 연주자를 추려낸 후 연주 수준을 고려해 1차 서류 합격자를 14일 발표한다. 오디션 일정은 추후 공지한다. 학생은 배제하고 직장인만 선발할 예정이다. 선발을 담당하는 예술단지원팀의 허난영 차장은 “음악 외의 직업에 종사하면서 연주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저녁 시간이 한가한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이달 중순부터 악기별 전문 강사와 함께 훈련을 해야하기 때문이다.

시민 오케스트라는 내년 봄부터는 학교·병원 등에서 펼치는 무료 공연으로 데뷔하고, 세종문화회관의 메인 무대에도 설 예정이다.

김호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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