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일린 승부수 불발 … 결국 꿈 접은 ‘컴백 키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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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케인의 72년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유명 해군 제독이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해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 성적은 꼴찌에서 다섯 번째였다. 베트남전은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다. 전투기를 조종하다가 격추된 뒤 베트남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5년 반 동안 고초를 겪었다. 신문 과정에서 그가 해군 사령관의 아들이란 사실을 안 베트콩은 관대함을 선전하기 위해 그에게 석방시켜 주겠다고 제안했다.

존 매케인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右)가 4일(현지시간) 애리조나주 피닉스에서 대선 패배를 인정하는 연설을 한 뒤 세라 페일린 공화당 부통령 후보와 악수하고 있다. [피닉스 AP=연합뉴스]


하지만 매케인은 “포로들은 생포된 순서대로 풀려나야 한다”며 거부했다. 그 결과 심한 고문을 당해 지금까지 다리가 불편하고 오른쪽 팔을 제대로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의 육체적 상처를 입었지만 ‘전쟁 영웅’이란 칭호를 얻었다. 이것은 그에게 워싱턴 진출의 발판이 됐다.

82년부터 임기 2년의 연방 하원의원을 두 차례 역임한 뒤 86년 애리조나주 상원의원(임기 6년) 선거에 도전해 승리한 후 4선을 기록했다. ‘이단아(maverick)’란 또 다른 별명은 불법 이민자 규제, 선거자금법 개혁 등에서 당의 입장을 따르지 않는 독자 노선을 걸으면서 얻었다.

순탄하던 정치 인생은 200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조지 W 부시 현 대통령에게 져 첫 번째 상처를 입었다. 지지 기반을 다시 쌓아 대선 출마에 대비했지만 지난해 중반 그의 지지율은 당내 대통령 후보군에서 3∼5위에 머물렀다. 공화당 경선 공식 레이스에서도 미트 롬니와 마이크 허커비에게 뒤진 3위로 출발했다. 거의 모든 언론은 “매케인은 끝났다”고 썼다. 그러나 매케인은 1월 8일 실시된 뉴햄프셔 프라이머리(예비경선)에 집중한 결과 극적으로 승리해 화려하게 컴백했다. 그리고 당내 경선 곳곳에서 승리해 일찌감치 3월에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정해졌다.

파란만장한 삶만큼이나 그의 개인적인 가정사도 복잡했다. 첫 번째 부인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쳐 치료받는 동안 백만장자이자 미인대회 출신인 지금의 부인 신디와 재혼해 조강지처를 버렸다는 세간의 비난을 샀다. 당시 18세 연상이었던 매케인은 신디에게 나이를 낮춰 말하고, 신디는 거꾸로 나이를 올려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하지만 80년 헤어진 전 부인도 그를 미워하지 않고 대선 유세를 도와줬다.

그는 선거운동 내내 자신과 부시를 차별화하려고 애썼다. 오바마의 변화 구호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고 노력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난 다음 날인 8월 29일 중앙 정계에선 무명이던 세라 페일린 알래스카 주지사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승부수를 던졌다. 많은 사람은 다섯 자녀를 둔 ‘하키 맘’(hockey mom·자녀교육에 열성인 어머니) 페일린에게 매료됐다. ‘페일린 돌풍’이 불면서 매케인의 지지율은 오바마를 추월했다. 도박은 성공하는 듯싶었다.

하지만 페일린이 TV 인터뷰에서 무경험과 무지를 노출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9월에 터진 금융위기는 매케인의 발목을 잡았다.

게다가 매케인은 적극 대처하지 못한 반면 오바마가 “매케인의 당선은 부시 행정부의 연장선”이라며 공격하자 지지율이 추락하기 시작했고 끝내 벽을 넘지 못했다.

최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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